우당탕탕 회사 적응기
“일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나요?”
팀장님이 일대일 면담에서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신기했다. 회사는 일을 하려고 다니는 곳이지 행복하려고 다니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업무 중에는 흥미로운 일들도 있지만, 그건 행복이랑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에게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환경과 업무가 주어졌다. 팀장님의 판단대로 나에게는 새로운 환경이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전보다 자신감과 안정감 속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자주 웃었다.
그 면담도 그렇고, 그 팀장님은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 입사 이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들이 계속됐다. 팀장님은 나뿐 아니라 모든 팀원들을 각별히 챙겼다. 마치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가꾸는 식물처럼 말을 걸고, 걱정해 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눈치채고 도와줬다. 그의 호의는 아주 조용하고 담담하고 공평하게 베풀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팀원 개개인에 대해 다 알 수 있는지 신기했다. 살면서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나는 궁금했다. 저렇게 팀원을 살뜰히 챙겨주는 게 팀장의 역할인 걸까? 의무라서?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따뜻해서? 팀원 관리를 잘하면 뭔가 인센티브를 받게 되는 걸까? 아마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답은 알 수 없겠지만, 차츰 답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고마울 뿐이었다.
고맙고, 때로는 죄송한 일들이 계속 생겼다. 그분은 내가 질문하러 다가갈 때 농담으로라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항상 반갑게 바라봤다. 그러면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서 질문할 수 있었다.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질문내용을 정리해도 막상 말이 잘 안 나올 때가 종종 있었는데, 팀장님이랑 대화하면서 차츰 자신감 있고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질문과 관련된 정말 정말 신기했던 일이 하나 있다. 가끔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빠르게 지나가서 그중에 어떤 걸 질문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그 모든 걸 다 물어보면 너무 장황해지기 때문에, 보통은 그중 가장 첫 번째 것을 물어본다.
가령 서비스 배포를 하기 전에 메신저로 사내채널에 공지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아직 배포 경험이 많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배포 공지를 위한 Form이 있는데, 그에 대한 가이드는 문서에 개략적으로만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배포공지 Form을 입력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다.
- 배포타깃 이름을 적는 인풋에 서비스 이름을 적게 되어있는데, 백엔드 프런트엔드 둘 다 똑같은 서비스 이름을 넣으면 되나?
- 서비스 이름 뒤에 괄호를 열고 FE 나 BE를 붙일까?
- 그럴 리 없을 것 같긴 한데 만약에 이 Form을 제출했을 때 validation이 이루어지는 거면 어떡하지? 각 인풋의 규칙이 정해져 있으면?
- 만약 그렇다면 그 validation은 누가 하는 거지?
- validation 이 실패하면 배포공지를 다시 해야 되나?
- 배포 공지를 여러 번 하면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 그러고 보니 하나의 서비스에 대한 배포 공지를 FE, BE 각각 따로 하는 게 맞나?
나는 고민 끝에 팀장님 자리로 향했다.
“무슨 일? “
“ㅁㅁ서비스 BE랑 FE를 배포하려고 합니다. 배포타깃 이름은 똑같이 적으면 될까요?”
배포라는 말을 듣자마자 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자리로 가서 보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모니터를 같이 보면서 나는 질문을 다시 말씀드렸다.
“ㅁㅁ서비스 BE랑 FE 배포 공지를 적을 때 배포타깃 이름은 둘 다 똑같이 적으면 될까요?”
“아~ 배포타깃? 공지는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한 번만 해도 돼요. 그리고 배포 타깃은 별도의 정규식 검증은 없어요.“
내가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않은 것들까지 대답을 듣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내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신기했다.
한 번은 내가 회사에서 나의 필요성이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팀장님은 단호하고 현명하게 ‘10년쯤 뒤에 지금보다 나아져 있을 것을 생각하고 열심히 할 것’을 조언해 주셨다. 잔뜩 졸아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조금 마음이 편해졌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중 내가 뭔가를 잘못 말하면, 팀장님은 그 자리에서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넌지시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질문을 주곤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틀리게 알고 있던 부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게 된 내용은 무엇인지 꼭 다시 말씀드렸는데, 그럴 때면 그는 차분하게 들어준 후에 칭찬이나 격려를 해주었다. 이게 특히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됐다.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나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주눅이 쉽게 드는 편이다. 어릴 때 얌전하고 성실해서 눈에 잘 안 띄는 편이라 집에서나 학교에서 거의 혼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틀렸다는 말을 듣거나 면박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이 된다. 몇 년 전 어느 방송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못된 사람이랑 일을 하면서 공황장애가 왔었던 것도, 그런 심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팀장님은 불필요하게 감정을 실어서 화를 내는 일이 없었고 매사에 차분했다. 아마 그만큼 본인이 책임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그 고마운 우산 속에서 나는 무럭무럭 자라 업무에 필요한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식적인 측면에서나, 회사생활 면에서나 입사 초반에 비해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조금 일찍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이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종종 하게 된다. 상담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 새롭게 사귄 개발자 친구들, 그리고 팀장님.
다큐멘터리 PD라는 오랜 꿈을 포기할 때 내 옆에 이런 선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프로그래밍을 독학하지 않고 늦게라도 대학에 진학했다면 거기서 이런 선배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마 나는 최대한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지금의 자리로는 올 수 없었겠지만 아마 나는 거기서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과분할 만큼의 행복을 느끼고 있듯이.
회사는 그냥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요즘 생각이 바뀌고 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만큼, 여기에서 행복해야 한다. 나도 언젠가 팀장이 하고 싶어졌다. 내 팀원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고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걸 지켜보면, 그건 나의 성장만큼이나 보람찬 일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