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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 Jul 21. 2021

오래된 낭만에 대하여

2021. 07. 21.


내게 인생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낭만'이다.

결혼식 서약서에도 낭만적인 삶은 3대 약속에 들어있을 정도로 나에게 낭만이라는 것은 그 어떤 부와 명성보다도 중요하다. 불현듯 나는 언제부터 이 낭만에 꽂혔을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유년시절은 정신적으로 조숙한 면모가 있었다. 어린이다운 것이 어린이에게 좋았을 법도 한데 나는 좀 너무 가버린(?) 어린이였다. 센티해진다는 기분을 초등학생 때도 종종 가졌으며, 그 기분이 좋아서 질질 끌고 다녔다. 우울증이나 뭐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고, 그냥 그런 감수성이 마음에 들었다. 몸에 딱 맞는 특색 있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남들은 갖지 못한 성향을 지닌 우월감이랄까?


중/고등학생 땐 그야말로 낭만 폭주기관차처럼 살았다. 새벽 일찍 첫차를 타고 광안리나 해운대를 찾고, 편의점에서 라면을 후후 불어먹었다. 오래된 폴더폰엔 그날의 감성을 담은 일기나 다짐들이 가득했다. 가끔은 학원을 빼먹고 아무 버스나 올라타기도 했다. 줄이 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심지어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다들 수능 준비하느라 하루하루 마음 졸이던 고3 시절에도 혼자서만 이상한 낭만에 취해있었다.

얼른 어른이 돼서 내가 상상해왔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고교시절 나는 전국에서 열리는 백일장을 찾아 참여하곤 했는데, 부산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이나 강원도에 가서 시를 쓰고 내려오는 일은 결과에 상관없는 낭만 파티였다. 아마 이보다 더 센티하게 사는 날은 다시없을지 모른다.


고대해던 스무 살이 된 이후로, 낭만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좋아하던 남자애의 집 앞을 빙글빙글 걷다 오고, 아무런 연도 없는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고, 사랑과 죽음과 같은 굵직한 것들을 생각하다 버스에서 울기도 했다. 가끔은 집을 벗어나 혼자 낡은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글을 쓰거나 맥주를 마셨다.


나의 낭만은 아름다운 청춘 영화라기보단 마니아들이 즐겨보는 독립영화 같은 장면으로 가득했다.

부유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나에게 낭만은 엄청난 보물이었고, 소심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몸과 마음이 둔해진 만큼 낭만도 많이 나이 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한 마흔다섯 정도로 급속히 노쇠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고향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계속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생각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안과 공포는 멀어지고 있음을 동시에 느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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