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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한복판에서

압구정 중학교

by 지은

강남 남쪽 끝자락에서 시작된 버스는 박스형 건물 사이를 비집고 한강을 향해 달려간다. 한강을 건너기 전, 유명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로 알려진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너른 운동장과 야트막한 건물이 소음차단벽에 둘러싸여 있다. ‘압구정 중학교’이다. 직사각형 창문으로 도배된 4층짜리 일자형 건물과 너른 모래 운동장은 근래에 지어진 학교들과는 다른, 그야말로 ‘옛날 학교’의 모습이다. 실제 이 학교는 1983년 개교했다. 개교 당시 압구정일대는 1970년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의 중심지로서 ‘황무지’에서 ‘대도시’로의 변화의 절정을 맞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빈곤의 시기를 지나 풍요 국가로 발돋움하던 1980년대 초였다.


잠시 고개를 돌려 압구정 중학교 주변을 살펴본다. 이곳은 ‘서울’이자 ‘강남’이며 ‘도시’이자 ‘도심’임을 알게 해준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어떤 재벌 총수가 산업화 관련 시설을 짓겠다며 당시 한강 모래밭이었던 땅을 메우겠다고 나섰다. 바로 그 땅이 지금 압구정 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모래밭이 땅으로 바뀌자 산업 시설을 짓겠다는 선언은 주택 공급으로 바뀌었고 대량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최소한의 땅 위에 여러 집을 지어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기에 ‘경제적’이었고 ‘효율적’이었다. 특히 경제 개발이 집중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에 이것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길’로 통하는 것은 없었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는 1976년 완공되었다.


압구정 중학교는 압구정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고 6년 뒤인 1983년 개교했다. 15층 높이의 아파트를 배경 삼아 성수대교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압구정 중학교는 ‘현대’ 그 자체였다. 텅 빈 운동장은 빼곡한 아파트 단지 풍경 속 ‘여백의 미’였고 아파트처럼 단순한 학교 정면은 현대 대도시 풍경과 별다른 이질감 없이 잘 섞여 들었다. 1970년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 시대, 그리고 그 막바지인 1980년대 초중반. 비슷한 시기에 근처에 개교한 1)‘신사중학교’(1984), ‘언북중학교’(1982), ‘언주중학교’(1981), ‘청담중학교’(1984)도 압구정 중학교와 그 모습이 많이 비슷했다. 대개 4층, 페인트칠 한 외벽, 규칙적인 직사각형 창문, ―자나 ¬자형 평면도, 입체적인 중앙 현관, 운동장 조회대, 일정한 분위기의 조경 양식이 그것이다.


이렇게 전부 일관적인 형태로 지어진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 학교들이 1962년도에 제정된 ‘문교부 표준설계도 7가지 형태’와 1972년, 1975년 2회에 걸쳐 서울특별시 교육 위원회(현 서울교육청)에서 작성한 ‘공간 모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문교부 표준 설계도’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오로지 교실 면적 등과 같은 계산된 수치만이 기록되어있다. 이 무렵 지어진 학교들이 ‘개발자 입장이 우선 시 된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만큼 ‘학교란 무엇이며 이곳을 어떻게 잘 지을 것인가’에 대한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튀는 모양 없이 일정한 형태의 창문과 중앙 집중 형태로 짠 조회대, 관리가 쉽고 단체 활동이 편리한 모래 운동장 같은 장치들은 당시 한국의 근대화 열풍 즉 맹목적인 ‘경제개발 중심 시대’를 전면으로 내비친다. 학교는 심지어 바로 옆 압구정 현대 아파트와 높이만 다른, 같은 건물처럼 보인다.


나는 이런 식으로 20세기에 만들어진 건물에 현재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운동장 조회대에서 ‘전체 차렷!, 열중 쉬어!, 차렷!’ 따위의 제식음성이 울리고 높은 직급의 사람이 ‘학교를 구경’하러 온다고 하면 전교생이 청소 활동에 동원된 열다섯 살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간을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3)내가 다닌 중학교 역시 20세기 중 후반에 만들어졌고 그 모습은 압구정 중학교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땐 평일 오전 9시에 학교 외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계절을 느꼈고 동복과 춘추복, 하복이 자연스러웠다. 평일 4교시는 ‘초딩’이었을 때나 가능했고 기본이 6교시였다. ‘ㅎ’으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친구들은 30번대 후반에서 인원수의 끝을 알렸다. 책상은 대개 둘 혹은 셋으로 짝을 이루어 칠판을 향하는 구조였다. 칠판 귀퉁이에 적힌 공지사항과 그 위에 걸린 빛이 바랜 태극기는 글쎄, 뭐랄까, 내게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교탁 대신 컴퓨터가 놓인 선생님 책상이 있었고 그 컴퓨터는 텔레비전과 연결되었다. 이때부터 익숙해진 ‘외부 입력’ 화면은 수업이 곧 시작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책상엔 가지런히 놓인 교과서 말고도 점심을 먹기 전 배급되던 하얀 우유가 놓여 있었다. 하얀 우유는 가끔 다람쥐와 토끼가 그려진 가루와 섞여 초코 우유나 딸기 우유가 되기도 했다. 고요한 수업 시간. 텅 빈 복도. 교실 앞문 옆에 걸린 액자 안에 단체 사진과 담임선생님의 사진이, 언제 정했는지도 모를 낯선 급훈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교실 안 스피커에서 쉬는 시간 10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책을 보고 있던 학생들이 정돈되어 있던 앞줄, 뒷줄을 흩뜨리며 교실 밖을 벗어났다. 앞줄, 뒷줄이라고 해봤자 교실 당 배정된 창문은 똑같았고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일정했다. 게시판과 사물함은 교실 뒤편에 ‘덩어리’로 있었다. 게시판을 채운 내용은 환경미화 심사 때문에 마지못해 전시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눈여겨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교실 천장에 붙은 네모난 히터(겸 에어컨)는 계절에 맞춰 불쾌지수를 조절하고 있었다. 다시 수업 시작 알람이 울리면 각자의 책상 앞에 앉아 과목별 선생님과 마주했다. 인터넷과 연결된 텔레비전 화면에서 학습 자료들이 선생님 말씀을 대변했고 그것에 집중하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핸드폰을 책상 아래 숨기고 엄지손가락으로 누군가와 글자를 주고받았다. 가끔 ‘매너모드’가 풀려 어느 학생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리면 선생님의 눈썹은 치켜 올라갔다. 연필보단 샤프를 쥐었고 다양한 디자인의 학용품이 넘쳐났다. ‘물건이 있느냐’ 보단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빈곤이란 단어는 이제 거리감이 느껴졌다. 개발, 효율을 앞세워 만든 20세기 한국의 근대화 테가 잔뜩 묻은 학교의 외관. 그 때 그 안에서 나의 세대는 모순적이게도 풍요의 21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21세기로 진입한 지 14년이 흐른 지금, 압구정 중학교와 함께한 한강이 성수대교 아래에서 반짝인다. 열다섯 살의 나도 슬그머니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이 글은 3호 <매거진 파노라마 463>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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