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내 눈높이보다 높다. 기차는 어느새 종착역인 청량리에 다다랐다. 다시 서울에 왔다. 누가 가라 한 적 없는 서울이고 또 오라 한 적도 없는 서울이지만 나는 기어코 서울에 발을 댄다. 내려도 여전히 거의 모든 것이 내 눈높이보다 높다. 출구로 향하는 계단마저도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지하에 있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비로소 아래로 움직인다. 그러나 지하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보기 위해선 천장에 붙어있는 모니터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고 또 주변의 높은 건물과 간판을 올려보며 목적지로 향한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만 내려보고 있다고 탓하지 말자. 그런 시간 빼곤 매일 이렇게 올려보고 살고 있으니. 심지어 사람을 올려보고 살기도 한다. 우러러서가 아니라 피치 못해. 혹은 마지 못해. 그래서 발코니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집착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진 리스가 쓴 소설 <한 밤이여, 안녕>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방 밖에는 작은 발코니도 있다. 발코니에 서서 서늘한 연철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베란다와 발코니의 차이부터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각 층의 면적 차로 생긴 공간이 베란다고 면적과 상관없이 별도의 바닥, 즉 노대를 만들어 활용한 곳이 발코니다. 그래서 아파트 난간이 있는 부분은 베란다가 아니라 발코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 살지 않아 높은 곳을 직접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볼 때 바로 옆을 달리는 승용차 윗부분을 바라볼 때나 3층 이상인 학교를 다니며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가 가장 흔한 기회였달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래서 특별하다.
서울을 바라본다. 아니 서울 속 발코니를 찾아간다. 그 어떤 막 없이 바깥을 느낄 수 있는 발코니를 찾아 나서지만 좀처럼 찾기 쉽지 않다. 모두 막에 둘러 싸여 있다. 막은 투명한 유리와 미끌거리는 틀, 촘촘한 망으로 짜여 있다. 얼마 전 삿포로로 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다. 바둑판처럼 정리가 된 시내를 걷다 그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20층짜리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엔 유리창이 없었다. 아찔한 높이에도 바깥이 그대로 난간 안쪽에 걸쳐 있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란 것이, 저기에서 사람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투신과 자살이라는 두 단어가 이어졌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지진 때문에 일본 고층 건물 발코니에 유리창이 설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진이 나면 유리창이 모두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유리창이 없는 발코니를 보고 감상적인 상상 대신 투신자살부터 먼저 생각하는 날 보며 과연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 온 여행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기저기 유리창으로 가로 막힌 발코니들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이 이런 풍경을 만들었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구입한 영역을 뚜렷하게 표시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추락을 막기 위한 안전망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
개인을 생각했다면 유리창이 다 똑같은 형태로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발코니는 선택권이 별로 없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중학생이 되면 당연히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하거나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이 여러 개일 수도 있는데 꼭 하나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 그렇다.
모두 똑같은 유리창이 붙은 발코니들을 바라본다. 편리, 안전, 효율만을 내세운 발코니 말고 ‘각자의 발코니’가 설 자리는 정말 없는 것일까. 물론 유리창이 붙어 있어도 어떤 발코니는 화분을, 다른 발코니는 틀을 바꾸는 식으로 개성을 표출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일 뿐이다. 그렇다. 발코니를 마치 단독 주택의 담장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 왜 그럴까?
힌트는 서로 마주하는 집 속 발코니 사이의 간격에 있다. 래미안 트윈파크만 봐도 운 좋게 도로나 강 쪽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맞은 편 단지에서 확보되는 시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나마 이곳은 탑형으로 지어져 단지 배치 사정이 나은 편이다. 흔히 성냥갑이라 하는 판상형 아파트에서는 서로의 발코니가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집 밖에서 눈치를 보고 사는 마당에 집에서 까지 건너편 집 발코니 눈치를 봐야 한다니. ‘취업은 어디로 할 거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같은 오지랖은 어쩌면 이런 간격으로부터 새어 나온 건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단 넓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소비자들의 욕구 때문이다. 사실 발코니의 바닥 면적은 분양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부 건설사는 서비스 면적이라 일컫는 발코니를 넓게 짠 뒤 발코니 확장을 권유한다. 즉, 발코니 면적을 뺀 59㎡ 짜리 집을 제 값에 내놓고 발코니를 확장시켜 ‘59㎡ +발코니 확장 넓이’의 집을 제공하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발코니 확장을 통해 제 넓이보다 더 넓은 집을 원래 분양 가격대로 가질 수 있으니 발코니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손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발코니는 더 이상 발코니가 아닌 방, 거실로 흡수되어버린다.
마지막으로, 발코니에서 바라볼 만한 풍경이 있냐는 것이다. 발코니 앞이 산, 강과 같은 자연이 가깝거나 전망대처럼 탁 트여 있는 것이 아니라면 건너편 단지를 바라보거나 각종 도시 시설물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도시를 바라보는 것에 뜻이 있지 않는 이상 차라리 거실 TV에서 나오는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발코니가 좋다. 엄밀히 말하면 유리창 없이 활짝 열려있는 발코니가 좋다. 건물 안이면서 건물 밖이기 때문이다. 또 생생한 날씨를 느끼며 발코니 아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고 생각에 잠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발코니로부터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발코니를 두고 버스가 점점 아파트와 멀어진다. 그곳의 발코니도 상상 속 발코니도 아스라이 사라진다.
─이 글은 4호 <매거진 파노라마 150>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