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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06. 2017

없는 대화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내가 따르고 싶은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는다. 그들의 의견에도 별 이견없이 동의하고 옹호하는 편이기도 하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정은 능력과 연관되는 단어가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를 알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단계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어쩐지 그들의 의견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할 때가 잦아졌다. 더 깊이,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선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아졌다.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이상이 지금 내가 처해있는 현재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쩐지 나는 점점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서 홀로 외롭다는 마음이 들었다. 함께 있어도 슬프기만 했다. 


그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인정받고 싶었다. 의문 혹은 반론이 아닌 그저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었다. 의문과 반론이 대화의 질을 높일 수 있지만,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말한 사람에 대한 공감이다. 그렇게 가까웁던 이가 "너는 공감을 잘 못한다"라고 할 때 어쩐지 대꾸 할 기력도 없이 침묵만 진해졌다. 반대로 정말 "나의 생각을 공감한 적 있어?" 되묻고 싶었지만, 침묵만이 유일하게 이 관계를 더 추락시키지 않을 언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나의 적나라한 생각들을 밝힌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곳에서조차,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을 끝내 써내려가지 못하고 머리 속에서나 빙빙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숨어서 하는 생각들만 늘어, 실제 현실에서의 대화는 가식일지도 모른다. 아니 또 어쩌면, 나는 정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없는 마음으로 없는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고 있었고 마침내 들켜버린걸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이 의문은, 세 번째 문단으로 다시 돌아가버린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은 무엇일까.


<제르베즈> 속 세계가 지금 내가 있는 세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 "가슴으로만 외치는 이상"은 이제 소용없다는 무력함?

내 가난은 어쩐지 금방 끝날 것 같진 않고, 그 가난이 나에게 주는 피곤함은 고통이니 우선 그 가난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절박함?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망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현재를 버티려고 아둥바둥하는 비참함?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을 이제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에 대한 억울함?


나의 의식주를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다.


한편, 내가 누군가에게 더 깊이 침묵하게 된 것은 축적에 의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에 강한 스트레스를 느끼는데, 이 현상이 빈번해 질 때가 점점 많아졌다. 이럴 때마다 부정적인 말을 반복할 때 너무 힘든데, 정작 상대방은 "나는 말해줘야 아는 사람이니깐 앞으로도 내가 실수 할 때마다 말해줘"라고 할 때,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한 두 번 말했으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가지 않는 선을 미리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 긴장하며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안 좋은 영향이란, 바로 "내가 상대방에게 안 좋은 말을 계속 해야 할 때"이다.

 

또, 공감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엔 진짜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나타날 때이다. 역지사지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대화라면, 내내 침묵하지 않을 수 있다. 쉽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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