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
어린이였을 때 어른을 좇을 때가 있었다. 일기장에 손바닥을 대고 연필로 따라 긋고는, 이 손바닥 크기가 영원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싸움은 애들이나 하는 것이며 내 미래는 고3때 결정된다고 믿었다. 영화 <우리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이제 막 중학생에 가까운 초등학생 때였다.
애늙은이 같다는 소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던 건 그것이야말로 정신적인 성숙의 상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자꾸 시간을 달리고 싶었고 하루 빨리 미성숙하다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때, 지혜를 만났다.
우린 고작 열한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처음 전학 온 날부터 우리는 생각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원주천을 달리다 벤치에 앉아 우습지만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버디버디 아이디는 특수문자 섞인 "인생의 지름길"이었고 나는 그것에 감명 받아 "장례식"으로 닉네임을 정했다. "인생길" 끝에 결국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당시의, 치기어린, 허무함, 예상, 두려움이 만든 이상한 ㅋㅋㅋ였다. 하지만 그런 단어와는 달리 우리의 실제 모습은 꽤 즐거웠고 그런대로 평범한 초등학생들이었다.
"야 그때 그냥 어른인 척 하지 말 걸 그랬어."
합정역 어느 곱창집에서 맥주를 앞에 둔 지혜가 말했다.
"나도.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는데 그냥 그때 다른 친구들처럼 지낼 걸."
내가 말했다.
"너는 내가 본 어린 시절 풍경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고마워. 학교 옆에 기찻길이 있었다던가 원주천이 있고, 교문 앞에 고물상이 있었다는 것도. 너 우리집 알잖아. 산 앞에 있는거. 가끔 생각나는 이런 풍경을 너는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니깐."
부모님 얘기, 서로의 형제 안부, 여행, 취업했다가 퇴사한 일, 원주와 서울, 방 계약 만료 날짜 이야기,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느낌, 아직 남아 있는 허무함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응원, 다시 현실.
"여기가 중앙시장이었으면 좋겠다."
"맞아."
"스물 여섯 되니깐 이제 막 불안해진다. 이제 슬슬 자리 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좀 무서워."
"나도"
"야 원주로 돌아가자"
"술 처먹더니 근자감만 남았냐 가봤자 할 것도 없고 만날 애들도 없어."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원테이블 위로 공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