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시대
저금리-저성장-저수익-고위험-국가개입-고실업-정치사회불안이 지속되는 2008년 이후, 다시 한 번 경제 그래프가 V자로 꺾일 수 있는 희망이 옅어진 2010년 이후의 상황이 바로 ‘뉴 노멀New Normal’ 시대다.
내가 막 성인으로 진입하던 2010년을 설명하자면 대중문화라 일컫는 하위문화 인기가 치솟고 전 세계적으로 케이팝이 흥하기 시작했다. 대형 기획사를 끼고 노래와 춤, 외모로 무장한 인재들이 매일같이 경쟁했다. 한편, 메이저의 반대편이었던 인디의 확장을 목격했다. 소위 ‘힙하다’는 것들의 연대가 공공연해지고 마침내 그들을 대표하던 인물이 인디를 벗어나 메이저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단 음악계뿐만 아니었다. 결국 메이저와 인디로 양분되었던 하위문화는 다시 하나가 되어 경계를 무너뜨렸다. 나는 동시대에서 그들과 같은 청년으로 이 현상을 함께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윤곽 ̄시공간적인 배경 ̄을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과거 영국, 프랑스, 미국 근현대사를 읽은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전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일방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거시적인 관점이 대부분이었다. 인물의 선악만을 대비시켜 업적을 좇고 ‘국가’를 위한 국민을 만들기에만 급급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편향되고 좁은 시선을 벗어나고 싶었다. 현대사회의 기초를 만들어낸 시공간에서 쏟아진 섬세한 과거를 읽을 때, 비로소 지금 내가 속한 시공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860년대 프랑스 북부 탄광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에밀 졸라 <제르미날>을 보며 마치 지금 바로 눈앞에 일어난 일인 듯 공감했다. 1900년대 초 런던 블룸즈버리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의 대화를 기록한 버지니아 울프의 작은 일화에 감동을 받았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 일화는 페미니즘에 관한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나조차 불과 몇 해 전까지 스스로 '한국 여성 코르셋'을 찬 채로 그것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 있는 이들의 현실 연대로 속박에서 풀려났다. 대상화되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말과 글, 시선을 모두 불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1991년에 태어나 ‘쥬니어 네이버’로 어린 시절을 나며 인터넷이 중심이던 학창 시절을 마치고 성인으로 진입한 2010년부터 스마트폰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의 197,80년대 고도성장 시절 주어진 ‘생애 주기’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이내 ‘꿈을 깨야 한다’는 걸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나온 사회에서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개의 일터를 전전하고 나서야 그것이 이미 젊음을 받쳐 국가를 위해 일한 중장년층의 습속이 시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목도했다.
남들처럼 트랙을 달리고 싶었고 그래야 진짜 삶이라 여겼다. 그래서 트랙에서 내려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곳에서 이탈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그 트랙은 출발점부터 이상했고 왜 내가 그 트랙을 돌아야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마침내 그곳을 이탈해 조용히 트랙 밖에 앉았다. 그곳을 돌아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을 때까지, 일단 그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앉아 있다 소위 ‘뒤질수도’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뭐 어차피 '뉴 노멀'이지 않은가. 어느 쪽이든 불행하다면 우선 나의 존재가 덜 아픈 곳에 머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