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주민 이지은이 바라 본 중랑구 봉화산로 풍경
어린 시절, 내게 서울은 크고 먼 세상이었다. 서울과 아무 연고가 없던 나는 주로 그 곳을 텔레비전이나 학습용 참고 사진으로만 느낄 수 있었고 가끔 몇 백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학교 현장학습을 통해서 그 곳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서울 밖에서 서울은 확실히 '모든 것의 중심'인 듯 했다. 매일 아침 서울 주요 교통 상황 방송이며 정치인이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서있는 곳, 다닥다닥 날씬하게 쭉 뻗어있는 아파트, 그런 서울을 배경으로 촬영 된 유명 예능 프로그램, 심지어 학교에서 이는 '인서울' 바람까지 말이다.
서울 버스를 타고 창 밖 너머 건축에 대해 소개하는 독립 건축 잡지 <매거진 파노라마> 에디터로 참여한 건 막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던 무렵이었다. 중랑구 신내동에서 출발한 273번 버스는 몇 분 채 가지 않아 단층, 삼각 지붕, 하얀 담장을 두른 단독 주택이 한 채 보이는 봉화산로를 내달렸다. 그리고 그 집은 서울 안 이주민에 불과했던 나를 서울 밖 원주민으로 되돌렸다. <매거진 파노라마> 속 '봉화산로 A주택'에 대한 글은 이렇게 시작될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불란서 주택’이라고 불리는 '봉화산로 A주택'에서 1990년에 제작된 <영심이>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 만화를 보면서 사춘기 소녀 영심이의 삶보다는 동생 순심이와 투닥 대고 거실엔 신문 읽는 아빠와 과일을 깎는 엄마가 있고, 창가에 턱을 괴고 별님에게 소원을 빌 수 있던 그녀의 집에 몹시 눈이 갔다. 영심이 집은 큰길 안쪽 골목에 있었고 담장 너머로 고층 빌딩이 보였다.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으로 음악방송 방청을 가고 한강 둑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그 뚝 너머로 한강철교가 흐르는 것을 보아 그녀가 사는 지역이 서울임을 알 수 있었다. 크고 먼 세상이었던 서울은 이런 식으로 나의 유년시절 속에 새겨질 수 있었다. '봉화산로 A주택'은 그런 영심이 집을 쏙 빼닮아 있었다. 그 글을 썼던 당시, 나는 홀로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 옥탑방에서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사방으로 다닥다닥 붙은 건물과 창문, 지붕, 아파트가 보였던 그 곳은 <영심이>에서 봤던 그녀의 집과 너무 달랐다. 그렇다. 영심이가 살던 서울과 내가 살던 서울의 풍경은 25년 만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영심이 집은 사방에 사람이 사는 요즘 공간과는 달리 '자기 공간'을 선언하는 담장, 대문과 초인종, 문패, 현관 위 야외 전등이 있었다. 옆집이나 앞집은 복도나 층이 아닌 큰 길이나 담장을 두고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그녀가 동생과 온 집안을 뛰며 싸우는 모습은 층간소음으로 예민한 요즘엔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며 심지어 소파가 벽 쪽에 붙어있지 않고 ㄱ형태로 이뤄진 구조, 아파트 평형별로 짜여 진 평면도가 아닌 모습 등은 <영심이>에서 느낄 수 있는 1980년대 단독주택의 특징이자 이상향이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역시 단독 주택에서 쭉 자라왔기 때문이다. 비록 외관은 영심이 집과 같은 '서울에 있는 불란서 주택'은 아니지만 말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어린 시절 다세대 구조, 특히 아파트에 모여 사는 또래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아파트를 공통점으로 동네 친구 그룹을 형성했다. 몇 동 몇 호로 끝나는 주소는 간결했고 아파트 이름은 어딘가 모르게 '있어 보이기'도 했다. 또 당시 뉴스에서는 대한민국 최고가 집이라며 모 주상복합아파트 시세를 보여주기도 했고 신문 부동산 면엔 아파트 이름과 평수가 빼곡했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집은 다세대가 모여 사는 형태가 당연한 듯 비춰졌고 갈수록 단독주택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국토가 좁아 땅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단독주택은 점점 보편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소수를 위한 '타운하우스'나 '유럽형 전원주택'만이 언급 될 뿐이었다.
만약 다세대가 아닌 단독주택이 주택 형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어땠을까. 영심이 집 같은 앞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 서울의 풍경으로 많이 남아있었다면, 서울 밖 사람인 내가 서울에 왔을 때 다세대주택 옥탑방에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층간소음 관련 뉴스가 나지 않고 시장엔 정원 관련 용품들이 불티나게 팔렸을지도 모른다. 가끔 이웃을 초대해 마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그리하여 저마다의 영역이 고유한 동시에 서로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간 확장 경험'이 빈번하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또 휴가철엔 굳이 펜션 여행을 고집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긍정에 치우친 상상이지만 아예 현실성이 없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2013년 말, 그런 서울을 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서울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본다. 사람만큼이나 건물도 참 많다. 지하철 노선도는 복잡해진 동시에 화려해졌다. 이런 거대 도시를 동경했던 나는 어느새 25년 전 영심이 집을 떠올리며 전혀 다른 서울을 꿈꾸고 있다. 2014년 봄, 우리의 서울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린 아이들에게 서울은 또 어떻게 기억될까.
─이 글은 2014년 6월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