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억과 망각의 반복
이름을 까먹었다. 디저트 바에서 가져온 포도와 망고를 설명하는 이 남자 아이 이름이 뭐더라. 분명 지난번에 한 번 봤는데. “채호.” 대각선 방향으로 앉은 아이의 엄마가 초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작년 봄, 고용주와 근로자로 만나 가을께 양꼬치 집 식사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아, 맞다. 대표님. 채호였죠.” 결국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뷔페 접시 위에 포도를 굴리는 아이 이름을 기억해냈다. 고작 두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름 석 자가 낯설다. 다른 능력은 몰라도 기억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요즘 부쩍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다.
문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좋은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나쁜 기억이 또렷해지기도 한다. 기억 깊은 곳에 있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기억도 있다. 가령, 얼마 전에 동생과 내가 다닌 초등학교 교문에 걸린 ‘본교 부임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에서 발견한 이름을 봤을 때다. 분명 나와는 상관없지만 언젠가 마주했던 이름 같고 어떤 관계가 있을 법한, 그리고 마침내 이름의 주인이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 지나치게 많은 정보)였다.
기억하기
도대체 기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은 ‘서술기억’이다. ‘서술기억’은 의미와 이해,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에 대한 기억인 의미기억과 일화에 대한 기억인 일화기억(자전기억)나뉜다. 의미기억의 대표적인 예는 언어학, 화학, 교향악 작품 등이다. 이밖에도 절차기억(습관)과 작업기억이 있다. 일화기억의 대표적인 예는 수업, 영화 또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나 우리가 들은 이야기다. 절차기억은 연주법을 익히는 등의 행위다. 작업기억은 누군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그 번호를 잠깐 기억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측두엽(양쪽 뇌 하단에 위치)에 있는 해마에서 일어난다. 이때 온갖 경험으로 인식한 정보가 생화학 신호와 전기 신호로 이루어진 뇌의 언어로 번역된다. 이 결과물이 기억이다.
망각하기
그런데 사람의 기억 저장 용량은 무한하지 않다. 그래서 쓰이지 않는 기존 기억은 새로운 기억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알아서 지워진다. 이것을 망각이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의 이름이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도 망각했기 때문이다. 뇌는 이미 존재하는 기억과 매순간 습득하는 기억을 위해 쉴 새 없이 작동할 수 없다. 이런 망각은 습관화, 소거, 차별화, 억압을 통해 일어난다. 이 네 가지 활동은 기억을 아예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의 접근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만약 이런 활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자극에 항상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의미의 우선순위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망각은 단절이 아닌 연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을 살아가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정신적 피로가 몰려오면 나는 우선 잠부터 잔다. 잠을 자는 동안 날카롭던 감정은 무뎌지고 쨍했던 기억도 희미해진다. 아마 이 행위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삶은 결국 기억과 망각의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