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산로 A 주택
서울 동쪽 지역인 중랑구 신내공영차고지에서 출발한 273번 버스는 신내택지개발지구를 지나 7호선 중화역 방향으로 달린다. 서울 외곽 지역 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왠지 시골스러운 이미지가 무색하리만큼 새 아파트가 내뱉는 깔끔하고 명료한 느낌은 이제 막 완성 된 경기도의 어느 신도시 같다. 잘 정리 된 최신형 동네를 달리던 버스는 얼마 안가 시간이 다소 더디게 흐르는 동네로 접어든다. 도시 건물치곤 비교적 낮은 건물들이 버스 창 밖에 즐비하고 그 건물들 사이로 차분함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단층짜리 양옥집과 눈이 마주친다.
얇고 새하얀 담장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별 다른 장식 없이 네모반듯한 군청색 대문은 집과 길을 분리하는 경계 역할을 하고 있고 담장 안쪽에 곧게 뻗은 커다란 목련 나무도 수줍은 듯 자신의 몸을 반쯤 숨기고 있다. 대문 너머로 나무색 현관이 바로 보이는 걸 보고 마당이 그리 크지 않음을 알 수 있지만 서울에서 제 집 마당 하나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떠올리면 별로 부정적인 사실은 아니다.
퍼뜩 어렸을 때 비디오로 본 <영심이>가 떠올랐다. 나는 그 만화를 보면서 사춘기 소녀 영심이의 삶보다는 동생 순심이와 투닥 대고, 거실에는 신문 읽는 아빠와 과일을 깎는 엄마가 있고, 영심이가 창가에 턱을 괴고 별님에게 소원을 빌던 그녀의 집이 더 궁금했다. 영심이 집은 큰길 안쪽 골목 사이에 있었고 담장 너머로 고층 빌딩이 보였다.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으로 음악방송 방청을 가고 한강 둑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그 뚝 너머로 한강철교가 흐르는 것을 보아 영심이가 사는 지역이 서울임을 알 수 있었다. 삼각지붕의 바로 아래에 작은 창문이 없다는 것과 골목 안쪽이 아닌 도로 가에 바로 대문이 있다는 것을 빼곤 그 군청색 대문 집은 영심이 집과 똑 닮아 있다. 군청색 대문 집에서 <영심이>가 떠오른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굳게 닫힌 군청색 대문 앞에 서니 으레 초인종부터 눌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주위로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문패를 읽게 되는데 바로 이런 점들이 대문이 주는 ‘자연스러움’이리라. 잠긴 대문 앞에 선 낯선 이는 문패를 보고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러 집안의 사람을 호출한다. 대문은 ‘경계’이자 ‘표시’이자 ‘소통’의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대문이 점차 생소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하는 건 대문보다 한 꺼풀 벗겨진 현관문인데 그마저도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공동주택에 적용되면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의 역할만 남은 ’공동 출입구‘로 바뀐다. 각 가구 구성원들의 구분선이자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호수가 표시된 현관문은 '공동 출입구'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주 할 수 있다. 문패 역시 호수로 바뀌거나 각 호수별 우편함 안 공과금 봉투 위에 써진 이름으로 그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다시 봉화산로 A주택을 바라본다. 대문보다 낮은 하얀 담장 너머 커다란 창문이 보인다. 그 창문 안쪽에서 담장 밖을 바라본다면 길을 걷는 사람들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길가에 있는 이 집은 낮은 담장을 둘러 시각적 개방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물리적인 독립성을 확보했다. 대문과 담장, 커다란 창문만큼 단독주택의 이미지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외부에 있는 현관등이다. 공동주택에서의 현관등은 신발이 놓인 실내 현관 위와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위에 달렸는데 후자는 공동으로 쓰이는 현관등이다. 다시 말해 같은 복도를 사용하는 가구가 공유하는 불빛이다. 그러나 단독주택에서의 외부 현관등은 그 집만이 소유한다. 때문에 현관등이 켜지고 꺼진다는 것은 그 집으로 사람이 출입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늦게 귀가하는 집 구성원들의 밤을 밝혀주기도 하고 때론 집에 초대되어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낸 손님을 배웅하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돕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영심이 집에도 비슷한 현관등이 있었다.
한편, 삼각 지붕 앞면에 ‘작은 창’이 나 있는 영심이 집은 그 창 모양이 사각형이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주택들은 사각형뿐만 아니라 원이나 육각, 팔각 등 다양한 형태의 창을 갖는다. 그리고 이 창은 주택이 단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봉화산로 A주택은 지붕 바로 아래에 창문이 아예 없다. 길 건너편에서 붉은 벽돌과 기와,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집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니 어쩐지 베란다로 가득 찬 옆집 공동주택과 비교 된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아파트, 그리고 그런 아파트에서 자란 아이들을 일컬어 '아파트 키드'라는 단어가 만들어 질 정도로 아파트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아파트에 산 적이 없다. 서울은 아니었지만 지방 소도시 어느 작은 동네에 있는 단층짜리 주택에서 이사 한번 가지 않고 살아 왔다. 그래서 나에게 집은 나의 모든 삶이 축적되어 있는 커다란 아카이브와 다름없는 곳이다. 학업 문제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이제 고향 집은 일 년에 몇 번 갈까 말까한 특별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비록 나의 고향집과 봉화산로 A 주택이 외관과 지역에서 어느 하나 일치하는 구석은 없지만 단독주택 이라는 커다란 공통점만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90년에 방영된 <영심이>는 8,90년대, 이른바 ‘삼저(저금리, 저달러, 저유가) 호황’이라고 불리는 경제 호황기를 배경으로 한다.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는 영심이의 아버지와 큰 창문을 열고 마당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진지 드세요’라고 외치는 영심이의 언니, 집안 곳곳을 쿵쾅 대며 뛰어다니는 영심이 동생 순심이, 매일 창문을 열고 밤하늘에 있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영심이 집 풍경은 지금 서울에 사는 보통의 서울 사람들에게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낯설다. 영심이 친구 월숙이가 살던 아파트가 한국 주거 형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요즘, 서울 도심과 멀지 않은 자리에서 차분하고 우아하게 세월을 내뿜는 군청색 대문 집이 자꾸 생각난다.
─이 글은 2호 <매거진 파노라마 273>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