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대천 바다

20.08.22.

by 준혁H


4년 전 그곳의 바다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이란,
얼마 남지 않은 흐릿하고 어두운 잔상과 몇장 되지 않는 저화질의 사진,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느껴져오는 당시의 축축한 기운뿐이다.

모처럼 고향 목포를 벗어난 공간에서 추석을 맞이하며 가족들은 충남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에 모였다.
당시만 해도 전라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떠날 기회가 매우 드물었던 나에게, 휴양지의 대표격인 대천에서 명절을 지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즐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서 마주한 서해 바다는 사실상 처음으로 만끽하는 드넓은 바다였다. 동네에서 익숙히 바라보고 지나가던 얕고 좁은 바다가 아닌, 한없이 넓으면서 길게 이어지는 바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결이 다른 특별한 존재인 것만 같이 물결과 모래와 빛깔이 어우러져 있었다.

한 품에 새로운 세계를 가득 안은 듯한 파도 향 설렘을 가슴에 지닌 채, 첫째날의 낮부터 둘째날의 낮까진 같이 온 가족들과 일정을 함께했다. 명절과 휴가의 경계에 놓인 시간들이 화기애애 채워지며 푸근한 한가위 아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엔 푸르게 맑던 전날과는 다르게 투두둑 비가 한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노을이 땅밑으로 완전히 저물어 하늘이 검검해지자 내리는 빗방울들의 두께는 더욱 굵어졌다. 폭우처럼 쏟아지진 않았지만, 마음을 편안히 놓은 채 평소처럼 바깥을 다니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날씨였다. 추적추적한 기상상태를 피해 친척들은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어른들은 술상 앞에서 자식들은 티비와 핸드폰 앞에서 저마다의 여유를 보내고자 하였다.

난 그 때 밤바다가 궁금했었다. 노랫 속 말로만 듣던 밤바다가 도대체 어떤 감촉을 갖고 있는지, 어떤 매력을 띄고 있는지 한꺼풀 알고 싶어졌다. 더군다나 비가 더해지는 밤바다라니…무언가 신비로움을 잔뜩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지루하게 머물 바에야 차라리 잠깐 바람이라도 쐴 겸,
바깥의 밤바다를 거닐고 오는 편이 훨 낫다 생각했다.



우산을 힘껏 쥐고 옷을 한껏 감싸며 외출을 허락맡았고, 마침내 부스스 내리는 비 속을 향해갈 수
있었다. 5분 정도를 걷자 숙소 바깥 상가 골목에 들어섰고, 거기서 5분 정도를 더 걸으니 해변으로 향하는 한적한 나무 길이 나왔다. 세로로 뻗어져 내리는 빗물 그리고 나뭇잎들 사이로 짙은 바다가 넘실넘실 그 움직임을 보여내는 듯했다.


숲 속 오솔길을 헤쳐가는 듯한 기분으로 거닐다가 발 밑으로 바스락 거리는 모래 소리가 생생해졌다. 해변에 본격적으로 다다른 것이었다. 시야를 펼치며 낮에 보았던 길고 넓은 해수욕장을 찬찬히 응시했다. 뒤편에 밀집한 횟집과 가게들에서 나오는 불빛이 비의 물기 틈으로 은은히 풍겨오고 있었다. 모래와 진흙이 섞여진 해변 위로는 여러 물길들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물과 흙은 서서히 경계를 지워내고 있었으며, 파도 소리와 비 소리 역시 어느새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끝으로 보이는 해안까지 헤아려도 열명도 채 안되는 사람들만 이 바다 이 비 사이에 위치할 뿐이었다. 홀로 걸음을 내딛으면서 더 가까이 더 깊숙히 들어갈수록, 바닷가 고유의 향기와 짙은 밤 특유의 분위기는 한데 뭉쳐져 살결에 닿았다.

그것은 내 첫 밤바다였다. 가벼운 산책인 동시에 생생한 모험이었다. 선명하게 촉촉하고 은근하게 감싸오던 감각들이었다. 그 때 그 자리 서 있던 나는 익숙한 현실의 액자 밖으로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비도 바다도 그리고 바람도, 마치 내가 거닐고 있는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무언가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자칫하다 감기들기에 쉬운 여건이었지만, 춥고 쓸쓸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들었다.
바다의 시간, 밤의 공간을 채우고 있던 부분들,
어느 하나 거세지 않고 부드럽게 날 감싸고 있었다.

아마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느낌을 당시에 처음으로 마음에 새긴 듯 하다. 어떠한 제약도 어떠한 굴레도 없이, 생생함의 현장과 현상을 부유하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빗물이 팔에 얹히고 모래가 살에 묻혀도 상관없었다. 해안 가운데 스치며 흐르는 공기는 밤바다를 만끽하는 사색과 산책을 자아낼 뿐이었다. 자유로움의 장면이 눈 앞에 재생되는 것 같았다.
비오는 밤바다의 길은, 고독한 혼자가 아닌
고고한 홀로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1시간 가량의 일정은 한 세상 가치의 여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하늘은 계속 거세지니 남색 빛 모험은 어쩔 수 없이 그리 끝났다. 하지만 뜻 깊은 일탈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마주한 평범함들마저 새로이 보이도록 이끌어냈다. 우산과 지면 사이 슬그머니 비치던 건물들의 조명과 그림자는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골목과 거리로 달려오던 빗방울은 저마다 이야기를 지니며 감성적인 소리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길을 지나오면서 뒤돌아봤을 때 해일같이 커다란 여운이 코 끝과 뺨 곁에 닿곤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감촉을 되새기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시공간을 유유히 헤엄치던 여기의 경험이 끊어지지 않기를 고대하는 바램을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꼭 다시 그 밤바다를 폭넓게 만끽하리라 다짐했다.
심야는 옅어져 다음날이 밝아왔고 우리는 대천과 명절을 떠나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묶임없이 홀로나서 가벼워진 걸음들에 어떠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 건, 그 밤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016년의 추석 이후로 대천의 밤바다와 유사하고 비슷한 감촉과 기운을 추구하며 여러 길을 거닐고 또 거닐었다. 장소와 상황은 모두 제각각이었으나, 산책과 사색에서 스며드는 자유로움의 무늬는
늘 한결 같았다. 이제 걷는 행위는 다리를 움직여 목적지로 나아가는 일을 넘어서, 색다른 오감으로
몽환을 한 움큼 품어보게 만드는 가치로 자리잡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밤 이후로 지난 몇년 간 대천을 찾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무한한 새 감각의 기회를 선물했으나, 사소한 머뭇거림 탓인지 일정이란 핑계 때문인지 대천을 다시 방문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서럽진 않다. 설령 여건이 안 맞거나 경우가 달리 돼 4년 전에 받은 환희가 온전하게 재현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대천의 밤과 대천의 바다는 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을테고, 언제든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심미를 고즈넉하게 담을테니 말이다.



다시 그 날의 유일한 조각을 꺼내어 살펴본다.
이제는 머나먼 과거의 흔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어둡고 짧은 이미지들만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희미한 저 편 너머의 감동을 받고 있나보다.
비가 적당한 밤이 오면 창 밖을 나서 풍경을 가까이 쳐다보는 게 버릇이 되었고,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줄곧 밤과 함께 발을 냉큼 뻗으니 말이다.
4년 전 어느날이 내게 드리운 추억 뒤에 난 아직도
분명한 영향을 받고 있다. 흐릿하고 또 아련해져서,
오히려 더 잃지 않을 잊기 싫은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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