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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혁H Aug 13. 2021

보통의 언어들

20.12.20.


가끔가다 주변을 향해 스스로를 소개해야 할 때가 찾아온다. 짧은 한마디로 나를 나타내는 개성 있는 표현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뼛속까지 문과'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대단한 문장력이나 탁월한 스피치, 해박한 어학 수준을 갖췄다는 게 아니라, ‘글’ 그리고 ‘말’과 관련된 것들에 깊게 마음을 쏟고 애착을 가진다는 의미다.


 어떤 배경과 연유에서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단지 책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하기 즐겨 하던 어릴 적의 경험이 그 시작점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무언가 확실하고 확연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글과 말은 나와 정말 가까운 존재들로 자리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읽어내고, 글로써 적어보며, 말로써 전달하는 일. 나아가 이러한 ‘언어’를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일. 문화와 사회의 모든 근본을 이루고 있는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이라면 뭐든지  마다하거나 꺼리는 경우 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공을 들였었다. 독서나 면담은 물론이며 나만의 소재와 문장으로 써내는 글짓기. 학교에서의 세미나 발표나 일터에서의 리셉션 응대까지. 때론 버벅이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 모든 일들 싫증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파면 팔수록 어렵고 또 무척 새로운, 언어만이 줄 수 있는 감각과 사고에 빠져들며 지내온 세월 내내 조금이나마 더 말과 글을 잘하고 잘 아는 사람이 되기를 항상 바래왔다. 비상한 언어 천재의 위치를 야심차게 넘보거나 탐하지는 않았으나, 말과 글과 밀접한 분야의 능통하고 열정적인 전문가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일부라도 닮아가고는 싶어졌다.



김이나 작사가는 그러한 동경의 대상 중에서도 늘 ‘원탑’이었다. 진심 어린 이야기를 선율 위에 세심히 적어가며 줄곧 센세이션을 일으킨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 노래 가사 역시 풍부하고 찬란한 문학이 될 수 있음을 수없이도 증명해낸 놀라운 예술가이자 뛰어난 직업인. 장르•분위기•메시지를 아우르며 삶의 장면을 색다르게 지켜보고 들어볼 수 있게 만드는 김이나의 말과 글을 마주할 때면, 무심결에 감탄이 터져나오기 일쑤였다. 언어를 하나의 명화 작품에 비유한다면 김이나는 아름다운 그림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액자마저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지어온 수십 수백 가지 가사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를 아주 적절히 그리고 조화롭게 활용하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살포시 어루만져준다는 것이다. 그녀가 참여한 음악들을 감상하다 보면, 수려하고 장황한 문장과 어휘가 아닌 보통의 언어들에서 비롯되는 특별함과 소중함을 음미할 수가 있게 된다. 김이나의 가사 속 세계에는 뻔하지도 너무 낯설지도 않게 공기 사이를 채우는 글자와 소리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 곁에 전달돼 다양한 결의 공감을 불러 모으는 이야기들이 있다. 소소하지만 든든할 설렘과 달램이 필요한 순간에 음악과 함께 다가와 우리에게 숨과 품을 선물해준다.


 자그마한 글자들의 더하기로만 머물 수도 있는 부분을, 김이나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따스한 시선과 태도를 돋보기로 쓰면서 이야기의 가능성을 포착해낸다. 심지어는 발음과 뉘앙스, 모양새와 쓰임새, 상황과 구성까지 두루두루 생각하며 글자들 사이의 빼기와 곱하기 나아가 나누기까지 시도한다.  지성와 감성의 힘을 쏟아붓는 계산 과정을 거쳐 글자의 나열은 곧 작품의 기반으로 갖춰진다. 어쩌면 시 한편, 때로는 소설 한권에 달하는 삶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삼삼한 노래맛에 맞도록 몇분짜리 노래말로 빚어진다.

 그녀만의 정성 어린 고찰이 녹아든 문장들이 이 책에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호감부터 시간이 들면서 생겨난 회한까지. 바깥의 세계와 내면의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상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향해 뱉어보는 촉촉하고도 오묘한 말과 글의 감촉들. 어쩌면 김이나라는 사람을 이 책은 전부 다 담아낸 듯하기도 하다. 차근차근 따라 읽다보면 따라서 느끼게 되는 공감의 널따란 서랍. 세간을 돌아다니는 말의 참된 뜻과 참된 맛을 기가 막히게 잘 사유하고 잘 담아내는 그녀가, 페이지 끝자락에서 유독 더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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