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혁H Aug 15. 2021

그래도 시도하길 잘했다

21.01.07.


내가 태어난 날은 12월 10일이다. 보통 한 해가 마무리되는 달의 둘째주에 생일을 맞이하곤 한다. 무심하게도 하필 그 시점은 학교 시험기간에 어김없이 포함되는 날이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나의 생일은 기말고사 준비기간 가운데에 줄곧 있어왔다. 그렇다보니 친구들끼리 파티를 하려해도 제대로 모이거나 놀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고, 대부분 과제와 공부가 쌓여있는 시기이니 생일이래도 마냥 즐기지 못하던 편이었다. 남들처럼 맘놓고 축하와 환희의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는 일이 매년 이어지곤 했다.
 
 지난 2019년 12월 역시 마찬가지로 흘러가는듯 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현생에 치이는 연말 시즌이 스멀스멀 찾아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학교 생활 중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주간이기도 했다. 전공 과목들의 기말 에세이 제출과 팀프로젝트 준비가 생일 앞뒤로 빼곡히 예정되어있었고 심지어 그 바로 다음날이 내가 발표자를 맡은 프레젠테이션 당일이기도 했다. 겨우 하나를 끝내놓으면 곧 이어 다른 무언가가 밀려오기 마련이었으니, 도무지 생일다운 생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었다. 일년 중 가장 뜻깊은 날이라 할 수 있는 하루를 이렇게 삭막하게 넘어가기엔 아쉬웠다. 모두가 바쁜 시험기간에 어차피 여럿이서 어울리긴 힘드니, 차라리 혼자만이라도 시간을 의미있고 재미나게 지내는건 어떨까 싶었다. 다른 누구와도 상관없이 모든 과업으로 벗어나 자유롭게 홀로 즐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몇 안되는 인생 기념일을 이번만이라도 특별하게 챙겨보고 싶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그 전날에 일을 다 마쳐두고 그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 복귀하기만 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나만의 일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찔한 발상 이후 이윽고 하루짜리 비밀스런 바캉스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공강 시간 틈틈이 서치한 끝에,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호텔방을 저렴하게 예약할 수 있었다. 때마침 10일날은 일주일 중 하루밖에 없는 화공강 날이었다. 완벽하게 짜여진 딱 하나뿐인 하루를 빈틈없이 연출하기 위해 미리미리 그날의 일정과 동선까지도 고안하고 구상했다. 팀플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할 작업은 최대한 완성을 시켰고, 정말 극소수의 짱친들말고는 생일날 계획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도 했다. 현생에서의 어떤 간섭도 관여도 적용되지 않은 24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기때문이다.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행여나 마무리 짓지 못한게 있는지 점검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하루짜리 바캉스에 필요한 짐들을 챙겨 서둘러 기숙사 바깥을 나섰다. 점심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삼청동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혜화로 옮겨 시간을 보낸 뒤 숙소로 이동해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전시도 둘러보고 영화도 관람하고 목욕도 편히 하고 혼술도 즐겼다. 낮부터 밤까지 정말 자유롭고 여유롭게 하루를 채워갔다. 마침내 날이 밝자 시간에 딱 맞춰서 수업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별 문제 없이 여유롭게 일탈을 실천하고, 언제 그랬냐는듯 일상으로 복귀한 셈이다.
 
 사실 급하게 준비한데다가 앞뒤로 빼곡히 자리잡은 일정으로 인해 미흡한 부분들이 약간 있기도 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급작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때엔 정말 행복이 충만했다. 온전히 나만의 취향으로 수놓은 24시간을 만든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이 그 날의 추억이 귀중하게 다가온다. 지금도 그 때의 결정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며 후회같은 건 남기지 않았다.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 중에서 그래도 시도하길 잘한 걸 딱 하나 정해보자면, 그때의 짜릿한 24시간을 단연 첫번째로 손꼽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물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