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목포로 향하던 당일에 느꼈던 혼란과 비애, 그리고 이어진 3일 동안 우리 사이를 잠식하던 먹먹한 상실감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처음 걱정했던 것보다 우리 식구들은 어둡지 않은, 오히려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분위기에서 할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입관식과 발인식 날 터져나오던 집안 어른들의 절규와 비통의 울음도, 며칠이 지나 삼우제를 올릴 때에는 온기가 올라간 애틋함의 눈물로 안착했다.
매번 명절이나 가족행사 시기에도 시간이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생겨 외가 온가족이 전원 다 모일 때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모든 친척이 한 자리에 뭉칠 수 있었다며 어른들이 매우 흐뭇해하셨다. 그로인해 처음으로 6남매 11손주들의 단체사진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볼 수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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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평생을 봐온 엄마와 이모들 삼촌들마저 생전 제대로 먼저 사랑한다고 말을 건네지 못한 것에 큰 후회를 느끼실 정도인데, 손자인 내가 미련 없이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완벽하게 보내드렸을리가 없다. 저번 4월달에 마지막으로 뵌 거라서 더 안타깝고 그렇다.
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면 볼수록, 할아버지가 지으신 나의 이름을 되새길수록, 아쉬움의 마음은 옅은 무늬를 한줄씩 더 새겨놓는 것만 같다. 왜 더 풍부하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왜 더 깊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까. 왜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뒤늦게 과거를 탓해보지만 더는 되돌릴 수 없음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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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변명의 일부겠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 손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새내기 시절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서울나들이를 이끌면서 학교구경을 도와드렸었다. 또 곳곳을 다니신 두분의 기록을 누나와 함께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선물해드리기도 하였다. 입대 전 설날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외갓집에서 가족사진을 찍었고 인화하여 나눠드릴수도 있었다.
삼우제를 치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날. 할아버지를 모셔둔 자리에 내가 찍어둔 사진 한장과 내가 적어낸 편지 엽서 한장을 곁에 같이 넣을 수 있었다. 생전 다 건네지 못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어떤 무엇도 부족하고 불완전하겠지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모습으로 할아버지께 남았을거라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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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치른 3일 동안 목포는 날씨가 우중충했는데, 놀랍게도 발인을 마치자마자 하늘이 맑게 개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외할머니는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너희 할아버지는 오복을 가진 사람"이라고. "의식주, 자식, 배우자, 건강, 그리고 마지막 죽음까지. 어느 하나 채워지지 않은 적 없이 잘 떠나가셨다"라고.
이제 내게는 할머니 두 분밖에 안 남았다. 아직은 건강하시지만 언제 어디서 작별할지 모르는 일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할머니들의 남은 세월 속에서는 더 진심을 다해 효도하고 싶다. 고마움을 아끼지 않고 사랑을 가득 품어야겠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면서 남아있는 이들에게 정을 더 베풀고 싶다.
나오기까지 2주가 남았다. 전역하고나서는 더 따뜻하고 든든한 손자가 되어야겠다. 할아버지가 지으신 뜻대로 실천할 줄 아는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