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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Jun 27. 2023

페스트

알베르 카뮈(1947)


훌륭한 문학작품에는 다음 3가지 요소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재미다. 제아무리 꼭 읽어야 하는 100선 목록 중에 포함되어 있어도 재미가 없으면 도무지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목록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인가?) 솔직해지자. 야심차게 구입한 두터운 책들이 머지않아 책장 속 한쪽을 차지하게 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사건 전개가 빠르고 스토리가 탄탄하며 등장 인물들간 형성되는 관계까지 흥미롭다면, 그리고 여기에 기막힌 반전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둘째,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뛰어난 문장력이 빠질 수 없다.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지중해 바다 위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는 문장은 AR렌즈를 통해 마치 지중해 바다가 우리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좋은 작가는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정교하게 포장할 수 있는 시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나, 시대정신, 혹은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면 재미와 시적 감동을 넘어 교훈까지 얻는 3종 세트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면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난 알베르 카뮈의 1947년 “페스트”를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꼽는데 망설임이 없다. 우선 재미있다. 400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빨리 읽힌다. 지중해를 마주 보고 있는 도시 오랑에서 발병한 페스트란 설정 자체가 일단 범상치 않다. (20세기에 페스트라니!)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고 발단과 전개, 절정과 마무리라는 이야기 흐름의 고전적 구도를 충실히 따르면서 서사의 기본기를 탄탄히 갖추고 있다. 게다가 각 장과 부로 넘어가는 흐름과 이음새 군데군데에 감칠맛 나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가령 처음 쥐를 발견한 건물 수위의 느닷없는 죽음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크랭크인으로, 이후 사건 전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적절한 순간순간에 인물들이 등장하고 알아서 사라진다(?). 그리고 페스트라는 블록버스터급 자연재난 앞에서 멘붕에 빠지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 헤쳐나갈 것을 주문하는 연대의식이 교훈으로 제공된다.      


“페스트”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카뮈는 1942년 “이방인” 출고 이후 5년 만인 1947년 페스트를 세상에 내놓는다. 전작인 이방인에서 한없이 냉담하고 부조리한 주인공인 뫼르소를 탄생시켰다면, 페스트에선 역시나 씨크하지만 연대를 통해서 희망을 제시하고 맞서 싸우려는 모습을 보이는 의사 리유를 등장시킨다. 


카뮈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다. 물론 본인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의심할 여지없는 자타공인 실존주의자였다. 카뮈가 태어난 1913년부터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1960년 사이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포함한 온갖 전쟁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즉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으며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존재란 무엇인지 등 온갖 회의적인 물음들이 끊일 수가 없던 암울한 시대였다. 또한 축구를 즐겼던 카뮈는 안타깝게도 17세 폐렴을 시작으로 평생을 폐결핵을 앓으면서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한다.      


“즉 삶 자체가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으로 에워싸인 감옥이며 그러한 조건 속의 삶을 살아야 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예외없이 수인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뮈에게 주어진 시대적 환경이나, 본인의 연약한 신체적 특징은 역설적으로 훌륭한 철학적 자양분으로 작동했던 것 같다. 카뮈에게 있어서 인생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대부분 철학자처럼 카뮈의 부조리 개념도 상당히 난해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어서 빙 둘러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또 다른 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는 그 유명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더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의자의 존재 이유, 즉 본질은 누군가에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자가 그런 기능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당장 버림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카뮈는 이것을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표현하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도 우연히,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이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고, 살아 숨 쉬며 존재하고 있다. 즉, 나의 실존이 어떤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는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 새벽잠에서 깨어 아무리 나의 존재 이유,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 막연하고 갑갑한, 모순과 불합리한 감정의 상태를 카뮈는 응축해서 부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실존주의의 ‘굉장히’ 염세주의적이고 음울한 모습이다. 니체나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 뺨친다. 그런데 실존주의 철학이 그렇다고 그렇게 허무적이진 않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지독히도 솔직한 철학이다. 


늘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아!라고 강요하는 철학이다. 


사실 실존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선택’인데,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늘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이걸 전문용어로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혼이 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지긴 했지만, 아무런 입력 프로그램 없이 내던져졌기 때문에 굉장히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유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자유이며 이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있지 않은가라는 수준 낮은 반론은 하지 말자. 죽음은 결국 승리하고 우린 다시 비존재로 돌아가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은 선택을 통해서 (즉, 반항하면서)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을 통해 아무런 가치가 없던 자기 자신을 창조하면서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페스트”에는 카뮈의 실존주의적 세계관이 그대로 녹아 있다. 페스트는 역병이다. 그런데 이것이 타루에게는 사형제도와 전쟁일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의 부조리를 겨냥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페스트를 물리친 것처럼 생각했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타루처럼. 


카뮈는 페스트에 대항하는 3가지 자세를 서로 다른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첫째, 도피적 태도다. 타지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는 페스트가 발병하자, 사랑하는 애인을 보기 위해 자신은 이 고장 사람이 아니라면서 도시를 탈출하려 노력한다. 물론 이후에는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라고 말하며 급작스럽게 철이 들어버리긴 하지만. 


두 번째는 회피적 태도다. 이것은 파늘루 신부를 통해서 묘사되는데, 존재의 우연성을 거부하고 필연성을 붙잡는 헛된 모습, 즉 자기기만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카뮈 못마땅한 것은 이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하는데 파늘루 신부로 대변되는 유신론자들은 비겁하게 ‘신’ 뒤로 숨어 버린다는 것이다. (페스트가 카뮈 작품 중 가장 무신론적 성격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의사 리유로 표현되는 반항적 태도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것이 카뮈가 생각하는 정답이다. 페스트는 분노한 신의 징계이기 때문에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리유는 쿨하게 한 귀로 듣고 흘린다. 


대신,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치료가 리유식 반항인 것이다. 리유의 세계관은 이후 타루의 보건대 조직을 통해 악과 질병과 전쟁과 죽음을 동반한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려는 모습으로 확장된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된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스트가 진정될 무렵, 리유와 타루는 한밤중 산책을 하며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들이 지중해 바닷속으로 몰래 들어가 헤엄치는 장면은 흡사 영화 가타카에서 주드 로와 에단 호크의 한밤 속 수영 장면을 연상시킨다. 감독이 페스트를 읽었음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 책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되는데,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두 인물인 타루와 리유의 진솔하고 긴 대화를 통해 -영화로 치면 롱테이크 촬영- 카뮈의 세계관을 가장 잘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대화와 해수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쥐들이 다시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즉 이런 방법으로든 저런 방법으로든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었다. 그 진리는 찬탄을 받을 만한 것은 못되고 다만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죽음은 모든 삶을 평준화시킨다. 카뮈 본인도 1960년 친구들과 함께 파리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열차를 탈 수 있었지만, 굳이 자동차를 ‘선택’해서 죽음이라는 ‘책임’을 져야만했다.) 하지만 카뮈는 항독투쟁, 공산주의 운동,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반항했고, 깨어있었다.   

   

우리는 얼마만큼 순간순간 선택에 충실한가? 혹 우리의 삶이 타성에 젖어 있지는 않은가. 의식의 깨어있음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습관대로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남들이 정해주거나, 혹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내 삶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삶에 얼마나 ‘반항’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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