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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Jun 27. 2023

작은 것들의 신: 케랄라 어느 지역의 가족 잔혹사

아룬다티 로이(1997)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은 1960년대 인도 남서부 케랄라 지역을 배경으로 한 상류층 집안의 몰락과 그 원인을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소설이다. 소설의 유형을 두개로만 나눈다면 이야기 소재가 흥미진진하고 전개속도가 매우 빨라 서둘러 읽게 되는 책과,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작은 것들의 신>은 후자에 가깝다. 


“아예메넴의 5월은 덥고 음울한 달이다. 낮은 길고 후덥지근하다. 강물은 낮아지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서 있는 초록 나무에서 검은 까마귀들이 샛노란 망고를 먹어댄다. 붉은 바나나가 익어간다. 잭프루트가 여물어 입을 벌린다. 과일향이 진동하는 공기 중을 방종한 청파리들이 공허하게 윙윙댄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져서는 햇볕 속에서 당황한 채 죽어간다.”

 

<작은 것들의 신>의 첫 문장이다. 시청각 전부를 자극하는 저 생생한 도입부 만으로도 우리는 케랄라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그 분위기는 시적이고 몽환적이며 아름다음과 슬픔을 물먹은 스펀지처럼 동시에 머금고 있다. 소설과 소설 속 인문들은 깊은 고독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소설 속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없는 뒤섞임이 아니라 작가의 정교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잘 설계된 건축물과 비교될 만 하다. 예를 들어 첫 장면인 장례식. 우리는 아직 9살에 불과한 소피 몰이 무슨 이유 때문에 죽었는지 모르며, 암무와 라헬-에스타가 장례식에 참석할 순 있었지만 왜 다른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떤 ‘사건’ 때문인데, 이 사건으로 암무는 오빠인 차코에게 쫒겨나 허름한 여관방에 누워 흡입기로 숨을 지탱하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에스타는 바바(암무와 이혼한 쌍둥이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지며, 라헬은 아예메넴에 남았지만 맘마치와 차코의 방치 속에서 여러 기숙학교를 전전한다. 이후 소설의 구조는 에스타가 아예메넴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라헬 또한 2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나간 시간을 한 겹씩 벗겨내며 거꾸로 진행된다.

 

소설의 주제는 ‘큰 것들에 대한 작은 것들의 저항’이다. 큰 것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카스트, 가부장제와 지구화의 이데올로기다. 특히 식민주의와 카스트는 작품 속에서 역사(History)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며 인도의 과거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은 것은 무엇인가. 우선은 큰 것들에 대한 저항이라고만 해두자. 

 

(1)식민주의: 인도는 1947년 영국의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식민주의적 가치가 인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의 원천이다. 등장인물들은 수시로 영문학 작품들의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려 한다. 예컨대 베이비 코참마는 영국에서 막 도착한 마거릿과 소피 몰을 공항에서 만났을 때 템페스트의 에어리얼의 대사를 인용한다. 공산당원인 필라이 동지도 자신의 집을 방문한 차코 앞에서 아들 레닌에게 셰익스피어의 비극 연설을 암송하게 한다. 물리적으로는 식민지배를 벗어났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식민지배에 너무나 깊숙히 동화되어 어느새 서구적인 것이 자신의 정체성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2)카스트: 1950년 인도정부가 불가촉천민을 폐지하고 모든 국민은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도는 카스트가 너무나도 편하고 익숙한 나라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파라반은 원래 인도 남서부와 스리랑카 일대 바닷가에서 생활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불가촉천민이 된 이후부터 ‘가촉민들이 만지는 것을 만져서도 안되고 브라만이나 시리아 기독교들이 자신들의 발자국을 밟아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빗자루로 발자국을 쓸어내리면서 뒷걸음치면서 기어야가’ 했다. 심지어 상위 계급민들에게 자신의 오염된 숨결이 전해지지 않도록 말할 땐 손으로 입을 가려야만 했다. 

 

암무와 라헬-에스타 모두로부터 사랑받았던 남자 벨루타. 벨루타는 파라반이었고, 불가촉촉민이었다. 그리고 벨루타는 ‘사건’의 직간접적 당사자다. 첫째, 벨루타는 아이들이 가출할 때 탔던 보트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보트가 강에서 뒤집히면서 소피 몰의 죽음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둘째, 암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면서 소피 몰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벨루타는 아이들을 유괴한 유괴범으로 몰려 경찰들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다. 이때 경찰들은 벨루타를 바로 체포하지 않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과도한 폭력을 가했다.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아마 카스트 제도의 위협에 대한 응징이었을 것이다. 경찰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폭행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응징이 엄격한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질서의 자기 보호본능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자신의 딸이 불가촉천민과 숨결을 나누었다는 불경한 생각에 분노에 사로잡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던 맘마치의 모습. 순진한 아이들을 꼬드겨 벨루타를 유괴범으로 몰아 무자비한 폭행과 죽음으로 몰아넣고야 만 베이비 코참마. 공산단원임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벨루타를 공장에서 배척하는 필라이의 행동 모두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물리적으론 사라졌을 지 몰라도 (무)의식 속에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 환기시킨다. 


서두에서 ‘작은 것’이 ‘큰 것’에 대한 저항이라고만 얼버무렸는데, 이쯤에서 작가가 말하는 저항의 의미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한 각주를 달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라헬과 에스타의 대화.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라헬과 에스타의 대화는 일반적이지 않다. 문법을 무시하고, 거꾸로 말하거나, 기표와 기의가 연결되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을 만들어낸다. 아이들의 단순한 언어유희 정도로 치부할 수 있지만 언어가 사회구조의 질서와 권력구조를 반영하는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라헬과 에스타의 대화를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에스타의 실어증. 아이들의 전복적 대화가 사건이 발생하기 전이라면 에스타의 실어증은 사건 발생 이후이다. 따라서 언어로 소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와 스스로를 단절시킨 에스타의 행동은 이전의 언어유희와도 같았던 대화보다 훨씬 더 강도높은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셋째. 암무와 벨루타. 작가는 이들의 인물설정을 통해 가장 세밀하고 격렬한 저항의 색깔을 입힌다. 암무는 시리아 정교도와 카스트 제도가 뿌리깊은 보수적인 지역에서 중매가 아닌 스스로의 결혼을 선택하고, 이내 알코올 중독에 빠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결심한다. 이혼녀라는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 암무는 용기있는 여성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혼녀’나 ‘어머니’의 역할에 묶어두지 않고 ‘몇 시간씩 강가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한밤중에 헤엄을 치는’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하다. 

 

벨루타는 어떠한가? 암무가 여성성이란 억압기제에 갖혀 있었다면, 벨루타는 신분제도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불가촉천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산당에 가입해 사회를 변화시켜보려는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기존 사회질서에 완전히 젖어들어,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고발하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캐릭터인 셈이다. 

 

그런 암무와 벨루타가 만나 비극적 사랑을 나눌 때 이들의 저항은 침묵 속에서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고야 만다. 아마도 벨루타와 암무는 서로의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들에게 다가올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오라비를 사랑한 죄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안티고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안티고네는 자기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부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플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한다.) 이들이 서로에게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내일’밖에 없었고, 그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소설의 구성으로 미리 알고 있었던 우리는 이들의 내일없음을 안타까운 탄식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벨루타와 암무도 내일이 오지 않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이 그것밖에 없었음으로 처연하고 슬프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슬프기만 한 것일까?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무것도 없음 전체를 걸고 저항할 수 있는 이는,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이것 저것을 골라낸 뒤 적당한 정도로 고개를 치켜드는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을 지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은 이미 왔다가 지나갔다. (…) 이제 오직 한가지만이 중요했다. 두 사람은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알았다. (…)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그들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웃었다.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에,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에, 강에서 늘 벨루타를 찾아내어 물곤 하는 작은 물고기 한쌍에.”

 

저항은 전복으로 이어져야만 마침내 완결된다고 믿는 이들에겐 소설의 결말(벨루타의 죽음, 이후 암무의 죽음)은 무기력해 보일 수 있다. 결국 그들은 큰 것들을 바꾸지 못한 채 작은 것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지프스가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마침내 정상에 올려다 놓은 아주 짧은 순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삶을 찬양하고 이 세계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암무와 벨루타의 저항은 우리 모두의 저항이고 그 저항은 계속 시도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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