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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Sep 02. 2023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어떤 책은 읽기 시작하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여운에 빠져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한다.      


어떤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이 책에 대해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쟁 같은 맛>이 이 모든 경우에 해당됐다. 저자인 그레이스 조는 뉴욕 시립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인 아버지와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책은 어머니의 삶을 추적해가는 회고록이자,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도일기다.      


죽은 부모의 감춰져 있던 삶을 들추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이런 힘겨운 작업을 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이 용기를 내서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것임으로. 저자의 경우에는 충동에 가까웠다. 글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저자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전쟁을 겪었다. 전쟁 중 가족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렸으며,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할 때는 남아 있던 가장 친한 가족(언니)를 잃어버린다. 미국 서부 끝자락 위에 있는 워싱턴 주에 정착해서는 심한 인종 차별과 편견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 와중에 남편과의 불화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요리였다. 산속으로 들어가 블루베리와 버섯을 채집해 온갖 요리를 만들었을 때 그때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생존이자 저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아하던 요리에 손을 놓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퀴즈쇼 같은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한다. 쥐를 애완견처럼 여기고,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어느 날 조현병이 불현듯 찾아온다. 당시에는 조현병의 발생 원인이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입원을 했고 약물치료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 어머니는 몇 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방안에 틀여박힌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과연 생물학적인 설명으로 어머니의 병과 죽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60년대 한국에서 외국인 남자와 살을 섞었다는 이유로 시작되었던 따가운 눈총과 차별은 미국에 와서도 인종차별이란 형태로 이어지며 그녀의 삶을 평생동안 짓누른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삶의 변화 속에서 그녀의 삶과 정신이 온전히 있었으리가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어머니는 어쩌다 한번씩 죽고 헤어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으이구 답답해라’라고 탄식에 가까운 말을 내뱉곤 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세월의 회한이 사무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어지간한 소설보다 흡입력이 강하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서술방식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저자와 어머니의 인생을 매우 속도감 있게 보여주되, 동시에 그 농도를 매우 짙게 전달한다. 특히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장면을 묘사한 장은 가히 압권이었다. 불과 저녁의 몇 시간이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소파에 발을 나란히 대고 앉아 있던 장면은 마치 영원의 일부를 각인시켜놓은것만 같았다. 그리고 애도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여전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어떻게 한 개인의 인생 위에 이렇게 무거운 짐이 올려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뒤늦게 바라본 또 다른 이의 마음에는 어떤 무거운 짐이 가득찰지. 부디 저자의 글이 충분한 애도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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