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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1. 2023

카뮈가 열어젖힌 부조리의 세계

13. 실존주의 시리즈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지기 시작해 로마 시대에 내려오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각색되어 계승되어 왔다. 등장하는 신과 인물은 당연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이 등장인물을 기본 수백명 이상 포함시키는 러시아 작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신화 속에는 세대 구분까지 해야 할 정도로 다양한 신들이 나오는데 이 신들은 강력한 힘과 권능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지만(제우스: 신들의 왕, 하데스: 지하세계의 신, 타나토스: 죽음의 신 등등) 때론 한 명의 인간에게 휘둘리고 사기 당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신들을 가지고 논 이들 중 한명의 이름은 시지프(Sisyphus)다.(시시프스, 시시포스, 시지프스 등 다양한 발음표기법이 있지만 여기선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프랑스어로 쓰여졌음을 존중해 시지프로 통일한다. 참고로 2020년에 나온 조승우, 박신혜 주연의 드라마 제목은 시지프스다.) 시지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코린토스(성경에 나오는 고린도전‧후서의 지명이다)의 왕이었는데 전해지는 (막장 상황극같은) 이야기 하나를 짧게 소개한다.   

   

어느날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걸보고 이걸 아소포스에게 일러바친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시지프를 잡아오라고 시키지만 이걸 예상하고 있던 시지프가 매복을 하다가 타나토스를 붙잡아 지하실에 감금 시켜버린다.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가 사라졌으니 세상에 죽음이 사라져버렸고 그러다보니 지하세계의 신인 하데스가 큰 영업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후 제우스는 어찌어찌 타나토스 구축작전을 성공시키고 시지프를 잡아오는데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시지프가 메소드 눈물연기를 보이면서 아내가 자신의 장례식도 치워주지 않았다면서 잠깐만 다시 이승에 다녀오겠다고 하데스에게 간청을 한다. 그렇게 하데스의 허락을 받아 다시 살아난 시지프는 당연히 지하세계로 돌아가지 않았고, 천수를 누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시지프의 신들 엿먹이기 무용담처럼 들리지만 시지프의 만행에 가만히 있을 제우스가 아니었다. 어쨌든 시지프는 인간이었고, 결국 죽고 나선 제우스를 만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 제우스는 오랜궁리 끝에 시지프에게 가장 잔혹한 형벌을 내리는데 평지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집채만한 바위를 굴려서 올려놓는 노역이었다. (시지프가 형벌을 받았다는 산이 지금도 고린도 지역에 있는데 가파르게 깎아내린 절벽은 그냥 올라가기에도 버거워 보인다.) 어차피 지옥에선 시간 제약도 없었을테니 피와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어떻게 한번은 굴려 올렸다고 치자. 문제는 바위를 산 꼭대기에 올려 놓기만 하면 마치 바위가 ‘어이 시지프. 나 올려놓느라 수고 많았어. 그럼 나 이제 다시 내려간다. 밑에서 봐!’라고 말하는것처럼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시지프는 이걸 영원히 반복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젠 ‘죽을때까지’란 제한이 없으니 시지프는 이론상 지금도 바위를 굴리고 있어야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트르르가 선택과 책임을 이야기했다면 카뮈는 줄기차게 부조리와 반항을 강조했다. 카뮈는 독특한 집필과 출간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정 주제를 정해놓곤 그걸 3부작(에세이‧소설‧희곡) 형태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카뮈의 글이 사르트르만큼 치밀한 논증구조를 갖추진 못했지만(아무래도 사르트르는 전업 철학자였으니까) 대신 카뮈는 소설과 희곡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둘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무려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사르트르도 소설을 쓰긴 했다. 개인적으로 <구토>를 두 번이나 읽었지만 좋은 소설을 읽었을때의 문학적 감명을 받진 못했다.) 카뮈의 3부작 시리즈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시지프 신화>는 순서상으로도 카뮈의 사상체계를 시작한 첫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부조리’였다. 카뮈는 무엇 때문에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의 영감을 받았던 걸까? 아니 그 전에 이 질문부터. 무엇이 카뮈를 부조리(不條理)란 개념에 꽂히게 했을까?      


당겨 말하자면 카뮈의 부조리를 낳은 씨앗은 죽음과 가난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차 있던 어린시절에 이미 심어져 있었다.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했지만 당시 알제리는 사실상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프랑스 태생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카뮈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이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포도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카뮈가 채 1살도 되기 전에 1차대전에 참전해 전사했고 하녀로 일했던 어머니 캐서린은 평생동안 문맹에 청각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카뮈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자주 회초리를 드는 등 매우 엄격하고 권위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심지어 함께 살던 외삼촌 에티엔 마저 귀머거리에 거의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이렇게 부모의 부재(아버지의 때이른 죽음과 어머니의 장애)는 소통의 부재이자 세상과의 단절로 다가왔다. 또한 카뮈는 훗살 스스로 고백한것처럼 가난을 부끄러워했고 또 부끄러워했다.      


카뮈는 어린 시절 축구를 좋아했던 소년이었는데, 실력이 꽤 좋은 골키퍼였다고 한다. 수치스럽게 여겼던 가난을 극복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건 상당부분 축구 덕분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축구팀에서 축구를 즐겼던 카뮈는 그러나 17살이 되던 해인 1930년에 폐결핵이 발병해 죽을 고비를 넘긴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카뮈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어야 했고 가난 속에서 자동차 수리공 같은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겨우 학위과정을 마치게 된다.            


그러니까 카뮈는 성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죽음과 가난의 맨얼굴을 들여다 보며 그 얼굴이 결코 자비롭지 않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자랐던 것이다. 죽음과 가난 앞에서 소외된 인간의 존재를 스스로 체험하면서 카뮈는 자기도 모르게 부조리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조리란 무엇인가?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며 매일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에서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권태가 어딘가 좀 메스꺼운데가 있다면서 사르트르를 간접적으로 인용한다. 사르트르도 그렇고 카뮈도 일단 ‘의식’을 통해서 습관에 의해 가려있던 것들을 벗겨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가 한없이 낯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카뮈는 이걸 ‘두껍다’라고 표현한다) 이 낯섦과 두려움의 감정이 바로 ‘부조리’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조리에 가장 어울리는 반대말을 생각해보니 기시감 또는 ‘데자뷔’가 떠오른다. 데자뷔가 분명 여기에 처음 왔는데 왔던 것 같은 친숙한 기분이 드는 감정이라면, 부조리는 분명 여기에 쭉 살고 있었는데 처음 와본 것 같은 생소한 기분이다.(영화 <트루먼 쇼>에서 극중 짐 캐리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사실상 가짜인 무대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감정이 아마 부조리였을 것이다.)      


카뮈는 계속해서 부조리란 본질적으로 어떤 이혼, 즉 절연(絶緣)이라고 부르면서 부조리는 서로 비교되는 두 요소의 대비에서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핵심은 이어져 있던 두 개(부부든 사물이든)가 영원히 끊어진다는걸 의미한다. 습관적으로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이른바 ‘의식의 각성’을 찐하게 하게 되면 나와 세계가 더 이상 이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마치 태아의 탯줄이 잘리는 순간과 비슷하지 않을까? 부조리는 그렇게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애초부터 내가 존재해야 할 필연성 따위는 없었으며, 난 그저 우연적 존재라는 메스꺼운 자각, 바로 이것이 부조리의 감정이다. (그러니 결국 사르트르의 구토나 카뮈의 부조리나 같은 의미인 셈이다.)      


자, 이제 부조리 각성제를 마셨으니 뭘 해야 하는가?      


앞서 이야기한 선택지(선택1: 무대에서 퇴장하기, 선택2: 무대에서 남아있기)를 조금 확장시켜 이야기해보자면 무대를 퇴장하는 선택지는 같은데, 무대에서 남아있는 선택지가 다시 둘로 나뉜다. 이걸 2-1과 2-2로 분류하자면 2-1은 ‘희망’으로, 2-2는 ‘반항’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희망은 간단히 말해서 내세에 대한 희망이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믿음. 죽어서 천국을 가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 모두 죽음 이후롤 상정한다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키에르케고르나 야스퍼스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태도를 회피나 비약이라고 비판한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부조리한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는 용기없는 행동인 것이다. 


무대에서 퇴장하기, 즉 자살하는 것도 올바른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단순히 자살하는게 윤리적으로 나쁘다 뭐 이런 식의 차원이 아니라 부조리의 공식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카뮈는 부조리란 오직 둘 사이의 균형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오로지 두 항의 비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강조했는데 자살은 곧 나의 존재를 없애는 것과 같기 때문에 더 이상 부조리의 조건이 성립될 수 없다. 나란 존재, 즉 의식이 없으면 세상이 부조리하든 조리하든 요리조리 돌려봐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단 하나! 반항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반항은 보통 부정적인 경우가 많지만(특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 입장에서) 카뮈에게 반항은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이다.      


카뮈는 반항을 하기 위한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도 일러준다. 턱은 한껏 치켜든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거나, 양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라고는… 안했고, 대신 버티라고 했다. 어디에서? 부조리의 사막에서. 그 사막은 바람 한줄기 불지않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한 곳이지만 우린 그곳에서 버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버틸때만이 드디어 우리의 존재에서 의미가 만들어지며 우리 삶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도 바위를 굴리고 있을 불쌍한 시지프를 다시 떠올려 보자. 카뮈가 시지프를 모티프로 채택한건 시지프의 가혹한 형벌 때문만이 아니다. 카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러니까 카뮈가 감명받은 순간은 힘들게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피땀범벅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다 올려놓자 마자 데굴데굴 굴러내려가는 바위를 뒤따라 내려가는 시지프의 발걸음이다. 이 순간이 감동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다시 내려가서 또 올려다놔봤자 바위는 영원히 굴러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의지 때문이다. 


요점은 이 반항이 한번에 그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카뮈는 시지프를 보며 불속에서 통째로 단련해 낸 이러한 의지에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100번 싸워서 100번 질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화 끈을 질끈 고쳐매는 자에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그런 사람에겐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 아우라를 남김없이 불태울 때 삶의 의미 또한 눈부시게 타오르는거 아닐까.      


그러니 우린 반항해야 한다.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우주가 개미 눈꼽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비록 우연이긴 하지만 내게 삶이 주어진 이상 이건 내거고 난 삶의 열정을 아낌없이 불태울거다! 계속 바위를 굴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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