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실존주의 시리즈
“어릴 적 꿈이 뭐였어요?” 라는 질문이 곧 “커서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 난 저 꿈이란 단어에는 모종의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부모의 소망이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내 인생이 ‘고정’되어야만 하는 경우에 그렇다.
실존주의자들이(특히 사르트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 ‘자기기만’일 것이다. 자기기만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기기만은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실존주의식 자기기만을 거칠게 분류해 보자면 아마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자신을 고정된 존재로 여기는 유형
2.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형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존재는 항상 미완성의 상태에 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우리는 어떤 본질(목적)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불명확하고 불확정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서 나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실존주의는 몹시 피곤하고 또 피곤하다. 그런데 이게 마음에 안들어도 실존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의 작동원리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왜 집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가? 왜 내 사무실 책상 위는 며칠만 신경을 안써도 온갖 불필요한 필기구와 서류들로 넘쳐 나는가? 왜 이 세상은 치우고 정리하기는 어려워도 어지럽히는건 그렇게도 쉬운가?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록 무질서가 높아진다는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다. 이게 싫다고 무작정 “뭐? 엔트로피 법칙? 난 그런 법칙 만드는거에 동의한 적 없는데?”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실존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자신을 고정된 존재로 여기는 이들이 자기기만의 첫 번째 부류인데, 그렇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피곤’해서다. 어떻게 매 순간순간 마다 선택을 내리고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나. 좀 쉬어가고 싶고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바로 자기기만의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때라고 보면 된다. (그런 면에서 한강에서 열리는 멍때리기 대회를 골수 실존주의자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남들도 고정된 존재로 못 박는걸 개의치 않는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저 유명한 ‘오늘 엄마가 죽었다’란 대사로 시작한다. 뫼르소는 엄마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후 여자친구와 해변에 놀라갔다가 의도치 않게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게 한 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뫼르소가 사형판결을 받는 과정이 조금 이상하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뫼로소의 변호사가 뫼르소에게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뫼로스가 슬퍼하지 않은 이유를 두고 감정을 억제해서 그런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뫼르소가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라고 대답하자 기겁한 변호사는 재판장에서 그런 말은 절대 꺼내지 말라고 일러둔다.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도 판사와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였는지 도통 관심이 없는 듯하다. 뫼르소가 죽인 사람은 아랍인인데 재판장에는 아랍인은 한명도 없고 온통 백인들 뿐이다. 심지어 죽은 아랍인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요양원에 있던 증인들은 뫼르소가 장례식장에서 졸았고,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웠고, 엄마의 나이도 몰랐으며, 엄마의 시신을 보려하지 않았다는 점등을 거론하면서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그 다음 차례로 뫼르소의 여자친구 마리가 증인석에 나온다. 살인사건 현장에 같이 있었으니 참고인 자격으로 설 수 있지만 정작 검사가 묻는 질문은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예컨대 그들이 어머니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영화를 보고 해변가에 놀러가는 등 ‘난잡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며 추궁하는 것이다.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쏜 총알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윽고 검사는 뫼르소의 ‘영혼’을 언급하면서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뫼르소는 영혼이 없는 인간이란 주장을 한다. 끝까지 뫼르소가 아랍인을 쏜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부조리할수가.
그러니까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살인자의 ‘행위’를 심판한 게 아니라 ‘인격’을 심판한 것이고, 뫼르소의 ‘선택’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규정한 것이다. 실제로 살인은 뫼르소의 말마따나 강렬한 태양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인데 재판장에 있는 사람들(판사, 검사, 증인들)은 모두 그것이 뫼르소의 본질 때문에 일어난 필연적인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 자기 뿐 아니라 남들 또한 고정된 존재로만 생각하려는 습관적인 태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덜 피곤하기 때문에. 쉽고 빠른 지름길이 있는데 왜 굳이 다른 길을 헤매야 하나? 그리고 우린 때로 그 지름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외길을 고집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타인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두 번째.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또 다른 부류의 자기기만주의자들로 이들은 이 세상의 ‘의미없음’이란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의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의미가 없다고? 좋았어. 내가 끝장나게 끝내주는 의미를 부여해주지.’ 대개 극단적인 종교적,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에서 이런 현상이 목격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주인공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이 정확히 그런 인물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어류 분류학자였던 조던은 당시 존재했던 전 세계 모든 어류에 1/5을 발견하고(심지어 조선까지 왔었더란다) 발견한 물고기 하나하나에 학명을 부여할 정도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처음 책을 읽다 보면 얼핏 보기에 과거에 대단한 업적을 쌓은 뛰어난 과학자에 대한 헌사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한때 저자의 우상이 될 뻔했던 위대한 과학의 추악한 이면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한편의 르포타주다.
우생학은 “좋은”과 “출생”을 합친 그리스어인데 이 말은 좋은 출생을 장려하겠단 뜻이 되겠으나 뒤집어보면 그렇지 않은 출생은 막겠다는 섬뜩한 말이기도 하다. 우생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의 이름은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인데 그는 신체적 결함이나 정신이상 같은 요소 뿐 아니라 게으르거나 방탕한 성격적 요인까지도 하나로 묶어 이 모든 것이 혈통의 문제이므로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만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하자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처음으로 꺼냈다. (어떤 테스트인지 궁금하긴 하다. 필기시험? 실기? 아니면 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곧바로 미국으로 직수입한 사람이 바로 조던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조던은 우생학기록보관소란 기관을 세워 우생학을 지지하는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한다. 거기에 결함이 있는 이들의 생식기를 아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까지 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불임시술에 근거를 제공한다(테스트는 무슨, 그냥 잘라버려!…) 이후 조던은 전국 우생학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까지 평생을,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정답을 바로 얘기하자면 그건 바로 ‘자연의 사다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박테리아에서부터 시작해 인간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수평으로 평등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다리처럼 수직적으로 우열이 나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맨 아래 가장 열등한 박테리아가 있고, 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이 사다리 꼭대기에 있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결함이 없는 완벽한 인간(종)이 사다리 꼭대기 위 꼭대기에 있다. 그런데 이쯤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히틀러다. 히틀러도 1920년대에 강제 불임화법을 통과시켰다. 위대한 아리안족의 혈통 운운하면서. 그리고 유대인 혐오를 조장하더니 결국 전쟁 중에 600만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여기서 다시 질문. 그렇다면 조던이 자연의 사다리에 맹목적인 집착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 따르면 그는 이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음에 어떻게든 있음을 채워야 했기에 자연이 그저 우연히, 무질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칙과 질서가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 질서를 찾아내 지켜내는 것이 쇠태해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믿어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릴 적 형의 때이른 죽음과 이후 아내와 아이들의 연이은 죽음을 보면서, 그들의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때의 슬픔보다, 그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세상에 의미가 없을리가 없다는 맹신은 자연의 사다리란 씨앗을 거쳐 자라났고, 나아가 우생학이란 싹을 틔워 조던을 돌이킬 수 없는 독단과 자기기만에 빠지게 한다. 앞서 구토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우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끊임없이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면서 우연성을 억압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 사물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그 사물의 정수를 파악했다고 자부한다. 우린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하며 살아간다.
이쯤에서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혹시 나도 세상의 의미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 세상에 그리고 나란 존재에 특정한 의미를 억지로 꿰맞추고 있는건 아닌지. 난 무엇무엇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옥죄이고 있는건 아닌지. 그리고 그렇게 세운 목표를 달성(혹은 정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마치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는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