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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Sep 27. 2023

참을 수 없는 시선의 불편함

17. 실존주의 시리즈 

시선을 의식한다는 말엔 꽤나 진지한 실존주의적 성찰이 담겨 있는데, 대부분 사르트르에서 시작됐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부빌 시 시립 박물관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 로캉탱은 시에서 유명했던 한 저명인사의 초상화를 보게 되고, 초상화 속 인물의 냉혹한 시선에 사로잡힌다. 아마도 사르트르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타자들과 만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타자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타자가 나의 대상이 되는 불꽃튀는 시선 경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선생님이나 부모님, 직장 상사에게 혼이 나고 분에 못이겨 똑바로 쳐다보면 ‘이게 잘못한 주제에 어디서 눈을 똑바로 치켜들고 있어. 눈 안깔아!?’라고 더 혼이 나곤 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군…)     


사르트르의 분류체계에 따르면 의식주체는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즉자존재(사물)

 (2)대자존재(자기를 의식하는 인간) 

 (3)대타존재(남을 의식하는 인간)     


앞서 사르트르를 소개할 때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지향성 이론은 현상학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니까 다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의식은 항상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성질이 있다. 즉 의식은 가만히 있거나,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란 생각보다 몹시도 어렵다. 잠깐만 눈을 감고 차분히 숨을 골라도 깜깜한 내 머리속에는 까맣네… 아무것도 안보인다… 군대 훈련 받을 때 생각난다… 동기들 잘 있나… 언제 한번 P를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서울 올라간 김에 새로 생긴 에스프레소 바를 가봐야지… 지금 커피나 한 잔 마실까… 아 그럼 저녁에 잘 수 있나… 저녁은 까많지… 이런 식으로 의식이란 녀석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자 이제 우리는 확실히 안다. 의식은 항상 자기에게서 빠져나와서 외부의 대상을 향해 달려간다. 이걸 막을 도리는 없다.  


즉자존재는 쉽게 말해 의식이 없는 존재를 뜻한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키보드나, 마우스 혹은 핸드폰까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전부 즉자존재, 즉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는 존재다. 이들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초월하지도 않고, 자기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반면에 대자존재는 인간을 의미한다. 자기와 대면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는데, 스스로 삶의 존재이유를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와 같은 의미다. 대자존재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의 대상을 향해 초월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안으로 초월하기도 한다. 이건 자기를 돌아본다는 뜻과도 같아서 성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모든 인간이 대자존재는 아니다. 의식이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것은 조금 전 말한 것처럼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지만, 방향을 바꿔 내부로 향하게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되돌아 본다는 건 단순히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깊이 있는 독서와 사색, 폭넓은 사람들과의 교제, 다양한 곳으로의 여행 등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게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나를 포함한)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인간은 실천적으로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론상으론 대자존재가 맞다. 그런데 대자존재가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대자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존재다. 그리고 이 대타존재란 개념이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핵심 개념이다. 앞서 우리는 대자존재를 말하면서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외부에 있는 대상을 향해간다고 했다. 그리고 이 대상은 핸드폰 같이 의식이 없는 즉자존재들이다. 그런데 이게 인간 대 인간 즉, 대자존재가 대자존재를 만났을 경우에는 조금 복잡해진다. 내가 만나는 그 누군가는 의식이 있는 존재일지라도 내 입장에서는 내 의식의 대상이자 객채이며, 더 나아가서 한낱 사물에 불과하다. (이건 사람을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의 대상으로서 그렇다는 말이다.)      


더 복잡한건 상대방도 나를 똑같이 여긴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시선에선 내가 거꾸로 그의 의식의 대상이자 객체, 사물로 전락한다. 이 상대방, 그러니까 낯선 타자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다. 타자의 시선에서 우리에게 자유란 없으며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타자의 시선에 종속된다. 이렇게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기도 모르게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대타존재다즉 나는 (나 자신을 성찰하는)대자존재이면서 동시에 (남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타자를 위한)대타존재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대자보다는 대타존재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혹시 소셜미디어의 조회수와 좋아요를 5분, 10분 간격으로 들여도 보고 있지는 않은지? 사르트르는 대타존재를 수치심으로 표현하는 걸 즐겨한 것 같다. 같은 프랑스인 철학자인 라깡은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수치론이라고까지 말했는데, 불어로 존재론(ontologie)과 수치론(hontologie)의 발음이 비슷한 걸 노린 일종의 언어유희다. 우리는 언제 수치심를 느끼는가? 혹시 혼자 있을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중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저 앞에 있는 여학생들을 의식해서 멋있어보이고 싶은 마음에 두 손을 놓고 타다가 그만 바닥에 나뒹굴었던 적이 있다. 무릎 살점이 뜯겨 나갈 정도로 말그대로 엄청나게 뒹굴었는데 그땐 너무 창피해서 아픈지도 모르고 얼른 일어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만약 아무도 없었으면 내 무릎은 피가 났을지언 정 얼굴마저 빨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내 행동을 타자의 시선에 비추어 봤을 때 그것이 부끄럽거나 떳떳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렇다고 꼭 부끄러울 때만 수치심을 느끼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 실존주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치심은 내가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고, 물질성을 얻은 대신 인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한다. 내가 타자로부터 그저 ‘바라보임을 당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핸드폰 같은 주변의 사물과 하등 다를게 없어 지는 것이다. 감히 의식있는 나를 물건 취급하다니!      


게다가 타자의 시선은 오로지 나의 현재성만을 바라본다. 


나의 의식은 끊임없이 나로부터 빠져나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데 타자의 시선은 나의 변화무쌍함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지금 현재의 내 모습에만 고정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도 타자를 바로볼때 그렇지 않은가? 회사에서도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하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고, 그 실수 하나로 마치 그 사람 전부를 안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다’란 명언을 남긴 신형철 평론가의 말은 얼마나 정확한지.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에겐 장대한 서사시를 써내려가면서도 타인에게 갖는 인식은 한 줄 영화평을 끄적거리는 수준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남겼다. ‘게으르게 만들어진 영화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인간을 납작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렇다. 타자의 시선(나의 시선이 될 수도 있는)은 언제든지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띄고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관계를 초월을 다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권력다툼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인간관계를 투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겪었던 일화다. 장성급 지휘관 한 분이 과로사로 쓰러져 그대로 돌아가신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본부 아침회의 참석을 위해 운전병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회의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오질 않으셨고 이상하다 생각한 운전병이 안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하려면 본부 2층에 있는 지휘통제실에 들어가서 휴일근무 신청을 했어야 했다. 시작할 때 신청하고 나올때 확인신청을 해야 했다. 나를 비롯한 초급장교들의 월급은 정말 박봉이었기 때문에 왠만해선 한 달에 40시간까지 허용되었던 초과근무를 꽉꽉 채우곤 했었다. 그래야 겨우 생활이 가능했으니까. 그날도 주중에 다하지 못했던 업무를 처리할겸 지휘통제실로 들어가 주말근무를 신청하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장례식이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당직근무를 서시던 통제관님은 나랑 평소에 잘 지내던 분이었는데, 나를 보시더니 “누구누구야. 이런 날까지 근무수당 신청하는 건 조금 아니지 않니?” 라고 말을 흐리셨다. 그 뒤에 나올 말을 삼키긴 하셨지만 이어지는 말은 분명 이랬을 것이다. ‘내가 평소에 너를 그렇게 안봤는데 지휘관님 마지막 가시는 일까지 돈을 받아야겠니.’ 근무신청을 허가해 주시긴 했지만 그 눈빛엔 안타까움과 씁쓸함, 그리고 힐난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날 향한 그 시선은 날카로웠고 난 그 날카로움에 베였다. 억울했다. 부대장으로 열린 장례식에도 당연히 참석했고, 이후 사무실에도 들러 성실하게 밀린 업무를 했으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선 아무말도 못하고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괜시리 부끄러웠다. 난 그럴 의도로 초과근무 신청을 하러 온게 아닌데. 통제관님을 비롯해서 주변에 있던 모든 당직자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이 수치심이었다. 그 통제관님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난 충성심이나 의리 따위는 없고 그저 월급 조금 더 받으려는 것밖에 안중에 없는 중위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법정에 선 뫼르소의 심정이 이랬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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