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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1. 2023

에필로그: 프리가이

여기까지가 내가 실존주의에 대해 느꼈던 생각을 두서없고 장황하게 풀어낸 이야기다.      


처음에는 실존주의에 대한 일기 정도를 쓴다는 심정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글이 이만큼 길어졌고 이왕 이렇게된거 더 욕심을 내서 한편의 시리즈로 완성시켜보자는 터무니없는 욕심이 들었고, 여기까지 흘러수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바위가 제대로 된 산 정상에 올라왔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무리는 짓고 도망쳐야되겠기에 한숨 두숨 팍팍 내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여태까지 쓴 글에 꽤 많은 책, 드라마, 영화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결론도 어느 한 영화를 소개하는 꼼수로 부려볼까 하는데…     


꼼수를 부려볼 대상은 2021년에 개봉한 숀 래비 감독의 <프리가이>란 영화다. 실존주의 태그를 붙일만한 영화를 찾아보면 많이 있지만(예컨대 <죽은 시인의 사회>같은?) <프리가이>야말로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실존주의적 양념이 듬뿍 쳐져 있다.(게다가 대부분의 난해한 실존주의 영화와 달리 <프리가이>는 재미있다. 이건 정말 높은 점수를 줘야 마땅하다!)      


(*출처: 네이버)


<프리가이>는 ‘프리시티’란 컴퓨터게임을 배경으로 그  안에 탑재되어 있는 NPC(Non-Player-Character)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영화다. 보통 롤플레잉 게임은 시작하기 전에 내가 게임 속 캐릭터를 미리 정하고(프리가이에서 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그 캐릭터를 조종하면서 경험치를 올리고 주어진 미션을 완수해 나간다. 요새는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게임 속에는 나말고 현실의 다른 이들이 움직이는 캐틱터들도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미션 수행을 위한 힌트를 알려주거나 경험치를 쌓게 도움을 주는 등 게임 진행을 위해 존재하는 말그대로 진행요원 역할의 캐릭터들도 있다. 이들이 바로 NPC다. 그러니까 게임을 만들때 미리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행동이나 대사밖에는 할 수 없다. 능청스러운 연기로 어느덧 할리우드의 서브장르로 자리잡은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가 NPC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이름은 가이(Guy)다. 직역하자면 ‘녀석’쯤 된다. 가이(또는 녀석)는 은행직원 NPC인데 매번 게임이 시작될때마다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떠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로켓포가 날아다니는 도심 속 아파트에서 씨리얼을 먹고 출근길에 똑같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은행에선 ‘좋은 하루를 보내지 마세요. 최고의 하루를 보내세요!’라는 똑같은 대사를 말한다. 그러다 진짜 캐릭터들이 미션수행을 위해 은행을 털러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두 손을 들고 바닥에 엎드려 친구 버디와 ‘오늘 퇴근하고 해변에서 맥주 한잔 콜?’ 식의 수다를 떠는 식이다.(그런데 아무리 NPC라도 그렇지 이름이 ‘녀석’과 ‘친구’가 뭔가…)     


흥미로운 점은 가이가 자신이 NPC란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번 200달러 짜리 운동화를 사고 싶어하지만 항상 180달러쯤 남아 있는 통장 잔고를 보며 ‘다음에 꼭 사야지’라고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날. 가이는 그날도 어김없이 은행이 털리던 도중에 우연히 길 건너편에서 자신이 이상형으로 꿈꾸던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은행털이범 플레이어의 썬글라스를 뺏어 자기가 쓰곤 그녀의 뒤를 쫒아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가이의 그런 행동은 사전에 입력되지 않은 프로그램 오류이기 때문이다.(당연히 현실에서 게임 개발 회사에서도 난리가 나 가이를 조종하는 사람이 NPC를 해킹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프리가이>는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실존주의의 영화 복사판이다. 첫재,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를 다룬다. 하이데거 이후 사르트르와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말그대로 이 세계에 그냥 내던져졌고 우리의 존재는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속 NPC들도 그렇다. 애초에 게임 개발자들이 게임을 만들었을 때 NPC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가이같은 은행직원? 얼마든지 다른 NPC로 대체 가능하다. 또한 가이도 은행직원이 아니라 운동용품 점원이나 카페 바리스타가 될 수 있었다. 하필 가이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썬글라스를 낀 플레이어들이 매순간 여러가지 선택지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반면(물론 대부분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이지만) NPC들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로 현재와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실존주의에서 의식은 ‘근본적으로 일시적인 존재’라서 언제나 지나친 과거이자,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상태에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가이는 어느날 여주인공 밀리(조디 코머)를 따라서 현실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캐릭터들이 모여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실제가 아니라 NPC란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잠깐이긴 해도 세상 친절했던 가이는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모든 NPC들에게 ‘이 빌어먹을 세상은 전부 다 가짜야!’ 라고 소리치며 행패를 부린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가이의 발걸음은 버디의 집을 향하는데. 가이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버디에게 네가 가짜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것 같냐고 묻는다. 이때 이어지는 버디의 대사.   

   

"난 지금 친구들 도우려고 하는데 진짜가 아니면 뭐 어때서설령 내가 진짜가 아니더라도 이 순간은 진짜야바로 여기바로 지금 이 순간은 진짜야"


아마도 버디는 자기가 NPC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종료하면 자기는 리셋되어 매번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알았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영원한 반복.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버디(친구)가 가이(녀석)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히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현재이며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나와 너를 통해 우리 존재의 의미가 빛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실존주의와의 세번째 공통 분모로 이어진다. 바로 사랑과 연대의식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마땅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타인의 시선은 지옥같을지 몰라도 결국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카뮈 또한 <페스트>에서 보여준 주제의식과 같이 인간의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줬다. 영화에서 가이가 정해진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지닌 캐릭터로 성장한 것은 밀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이는 관습적인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섬이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걸 알고는 광장으로 모든 NPC들을 불러모은다. 그리곤 막연하게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하는 NPC들에게,      


"정해진대로만 하는 것은 오늘로 끝어떻게 살것인지 우리가 결정하는 곳에 가자!"며 함께 하자고 독려한다.        

군사훈련을 받을 때 가장 힘든 훈련이 뭐였냐고 누가 묻을때면 난 항상 ‘행군이요!’라고 대답한다. 화생방 훈련도 두번 다시 하기 싫지만 그래도 ‘짧고 굵게’ 끝났기 때문에 최악은 아니였다. 하지만 2박 3일동안 30kg 군장을 메고 200km에 가까운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매우 길고 매우 굵은’ 고통이었다. 그냥 바닥에 덜썩 주저앉아 마시는 시원한 물 한모금이 어찌나 달았던지, 나중에 일부러 물 보급을 안해주었을땐 꼭 생수만 마시던 내가 산 중턱에 있는 휴게실 수돗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었고, 어쩌다 도로 옆 편의점이라도 보이면 당장 뛰어 들어가 포카리스웨이트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한 100km쯤 지나니까 하나둘씩 낙오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 정도면 나도 꽤 버틴거 같은데?’란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랬던 나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 한 힘은 시원한 물 한모금이나 포카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군장을 나눠 지며 걷는 좌우 동료들의 모습이었다.(반면 중간중간에 훈련 소대장들이 사라졌다 어느샌가 나타나 같이 걷곤 했는데, 처음엔 왠 홍길동 같은 상황인가 싶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돌아가면서 물품운반용 차량에 슬쩍 얻어탔다고 한다…)    

  

난 행군 내내 언제라도 금방 쓰러질 상태여서 누구걸 대신 들어주진 못했지만, 체력이 좋은 친구들은 종종 옆 동료의 총이나 배낭을 대신 짊어지거나 하다못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때 뒤에서 등을 힘껏 밀어주기도 했다. 어쩌다 누가 낙오라도 할 낌새를 보이면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하나둘씩 나타나 힘을 보태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어느새 눈가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뭔가가 핑 돌았다. 본인도 죽을만큼 힘이 들텐데 누군가에게 자기의 힘을 나눠 준다는 것은 인간이 생존본능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을 무색케 한다. 더 놀라운 건 조금씩 보태주던 그 힘이 행군대열 전체에 퍼지고 퍼져(마치 물고기와 보리떡이 무한대로 늘어단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부대원 전체가 그 힘을 나누어 가졌다는 사실이다. 아 이런게 행군의 묘미구나. ‘지금 여기, 함께’라는게 이런거구나...


돌이켜보면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아름다운 형태로 소리없이 스멀스멀 퍼지는 힘 덕분이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대학원 공부를 핑계로 체력관리를 제대로 못한채 급하게 입대를 하는 바람에 내 체력은 정말 저질이었는데, 결국 비실비실대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폐렴이란걸 걸려 2주 정도는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런 저질체력이었던 내가 행군을 완주한건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행군보다 훨씬 더 힘든 사회생활에서 번아웃된 나를 종종 일으켜 세운다.   

   

실존주의는 그 어떤 철학분야도 개인적인 철학이다.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를 이해하려 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존재가 중요하며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를 발하며 살아가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강조한게 바로 실존주의다. 그랬던 실존주의가 ‘나’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우리’를 말하고 있다. ‘개인’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혼자’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함께’ 버텨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고 한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신화 속의 시지프는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바위를 굴려 올렸지만 우리는 함께 바위를 밀어 올리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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