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o Oct 21. 2023

우리는 (함께)반항한다, 고로 (함께)존재한다!

18. 실존주의 시리즈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소설을 읽다 보면 제일 앞 부분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인물관계도가 있는 경우가 있다. 누가 누구와 우호적 관계인지, 대립 관계인지 혹은 중립적인지를 다른 색깔의 화살표로 표시한 그림을 보다보면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가 대충 감이 잡힌다. 아하, A랑 B가 서로 원수처럼 싸우다가 나중에 동맹을 맺는데 나중에 그 B동생인 C한테 배신을 당하고 A의 아들인 D가 다시 복수를 하는군.       

 

철학도 워낙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는 학문 분야다 보니 왠만한 소설 인물관계도보다 복잡한 경우가 많다. 아직까지 실존주의 인물관계도를 본 적은 없는데 만약 하나 만들어 본다면 역시나 꽤나 복잡한 그림일 것 같다. 카뮈도 분명 많은 화살표들이 오가는 지점(nod)일텐데(카뮈-사르트르는 우호적, 적대적 화살표 2개가 필요하다) 그 화살표 중 하나를 따라 가다보면 뜻밖의 인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초대박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한 마이클 샌델이다. 샌델??? 책을 읽진 않았지만 이 책이 집에 없는 사람은 없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온 국민이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데 샌델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출처: 조선일보)


책의 유명세에 비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마이클 샌델의 주장이 정치철학의 한 분야인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는 점이다.(샌델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지만 90%이상은 공동체주의자라고 보는게 맞다.) 공동체주의는 쉽게 말해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입장이다. 공동체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입장은 자유주의인데, 자기가 어느 입장에 더 가까운지를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가 있다.      


‘옳음(권리)’과 ‘좋음(선)’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겉으로만 보면 실존주의는 자유주의에 기반하는 사상처럼 보인다. 자유주의는 가치의 선택을 개인에게 맡기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태껏 계속 이야기한게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매 순간 내리는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고까지 했다. 어떤 특정한 가치가 옳다고 정해버리고 각각의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라고 강요할 때 개인의 선택과 가치는 무시되버린다. 사실 오늘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처럼 보인다. 개인의 발전과 사생활보다 회사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MZ세대들에게 먹힐 것 같은가?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당분간 야근과 주말근무를 좀 하자고 하면 통할 것 같은가? 어림도 없다. 공동체주의는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칙칙하며 억압적인 분위기가 물씬 배어 나온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보자. 누구든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가(때론 그것만이) 옳다고 외치는 사회를. 타인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기들로 넘치는 사회를. 얼마전에 버스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승객 한명이 뒤에 다른 승객이 있는데도 자기 자리를 최대한 뒤로 젖혀 인터넷에 올라온 일이 있었다. 대각선 뒤쪽에 앉아있는 다른 승객이 찍은 영상이었는데, 뒤로 젖혀진 의자와 뒷좌석 승객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cm되 되어 보이지 않았다.(고속버스 좌석이 저렇게 많이 젖혀지다니?) 영상까지 올라온 이유는 자리를 조금만 더 앞으로 당겨달라는 부탁에 앞좌석 승객이 그냥 싫다. 이렇게 뒤로 젖혀질 수 있다는건 그렇게 해도 된다는 말 아니냐, 식으로 대답하면서 막무가내로 버텼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선 버스기사님이나 주위 승객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려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주 조금 자리를 앞으로 당기는 선에서 마무리된 걸로 안다.      


우리가 심심치 않게 인터넷 기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회적 민폐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이외에도 층간소음이나 주차시비는 어느덧 단골메뉴로 자리잡았는데 모두 이슈가 되는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일단 타인에 대한 배려는 다음이고 내가 편한게 우선이다. 그리고 내가 봤을때 괜찮다 싶으면 그게 사실과 확신으로 굳어져서, 누가 그게 아니라고 딴지를 걸면 그것이 상황에 대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공격하는것 같아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낸다. 최근들어 증가하고 있는 묻지마 폭행, 살인 사건 등을 보면 우리사회가 언제 이렇게 병이 들었나 싶어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물론 사회가 이렇게 병이 들었다는걸 자유주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란 가장 기본적인 단서조항을 붙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기준인지를 정하는 일을 개인에게만 맡기는 일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 기준은 너무나도 상대적으로 보인다.     


또 생각해보자. 왜 우리가 중국의 동북아 역사 왜곡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지.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내가 함께 아파하고 화를 내는가? 공동체주의에서 말하길 우리가 ‘무연고적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로 태어났으며 어느 국가의 국민으로, 어느 사회의 시민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커다란 서사가 진행 중이었고 우리는 좋든 싫든 그 서사 안에 한 명의 등장인물로 포함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과거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들이 아니라 윗 세대와 그 윗 세대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데도 후속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건 그들이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는 공통체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상황 속 존재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했듯이 우리 존재는 시간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단 한 순간도 특정한 상황(=시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도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만약 이러한 책임을 회피해 시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자기기만이라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사르트르는 또한 인간이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는 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 자유가 하고 싶은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방종의 자유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는데 그 책임에는 타인의 존재와 자유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책임도 있는 것이다.      


타인과의 공존을 가장 적극적으로 설명한 이는 역시 카뮈다.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곤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제멋대로 판단해버리는 ‘폭력적’인 시선이 있는 반면에, 아이를 품에 안고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시선도 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교도관의 ‘감시하는’ 시선이 있다면 이제 곧 신기록 갱신을 앞두고 있는 운동선수의 몸짓을 ‘응원하는’ 시선도 있다. 그렇다면 낯선 타인들과 어울려 사는 이 세상은 지옥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천국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어깨 기대며 사는 세상도 있지 않을까?     


카뮈는 그럴 수 있다고 상상했다. 


이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 출판을 통해 인지도가 올라간 카뮈는 1947년 <페스트>를 통해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다. 소설의 배경은 오랑이라는 도시인데, 소설에서는 오랑이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고 나오지만, 지금 오랑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알제리에 제2도시다. 카뮈는 도시가 바다를 등지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건 다분히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도시 전체를 하나의 감옥과 같은 고립된 공간으로 만드려는 설정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의사인 리유가 어느날 아침 계단에서 죽어 있는 쥐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데, 수위의 죽음을 계기로 페스트가 삽식간에 온 도시로 퍼져 나간다. 이윽고 도시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대구가 그럴뻔 했던 것처럼) 기한없는 고립이 시작된다.      


(*출처: 나무위키. 지금의 오랑 모습)


이후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페스트에 대처하는 방식을 구분한다. 등장인물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1) 회피형, 2) 초월형, 3) 반항형이다.  어? 어디서 본듯한 분류인가 싶어서 봤더니 앞서 언급한 부조리 각성제 이후의 세 가지 선택지와 같다. 1) 회피형(=무대에서 퇴장), 2) 초월형(=희망 갖기), 3) 반항형(=말그대로 반항하기!)     


<페스트> 속 회피형 인물은 신문기자인 랑베르다. 취재 차 오랑을 방문했던 랑베르는 페스트가 퍼지면서 도시가 봉쇄되자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한다. 거듭된 탈출실패로 랑베르는 결국 밖으로 나가는걸 포기하지만 그전까지 랑베르가 보인 태도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자기와 상관없다는 식의 거리두기였다. 소설 속에서 또다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파늘루 신부는 두 번째 초월형 인물을 상징한다. 페스트라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직면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데 파늘루 신부는 이것이 신의 ‘징벌’이자 ‘재앙’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세 번째 유형은 리유 본인으로 표상되는 반항형 인간이다. 리유는 계속해서 페스트가 신의 뜻이자 징벌이라는 설교를 계속하는 파늘루 신부에 대척점에 선다. 대신 타루와 함께 자원의료봉사대를 구성해 ‘치료’를 시작한다. 이 치료가 리유에겐 곧 ‘반항’인 셈이었는데 리유는 그렇게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하는 반항하는 인물이었다.      


이후 (혼자만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낀)랑베르가 성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리유가 이끄는 자원봉사대에 합류하면서 치료를 통한 반항의 움직임이 거세진다. 결국 어느 순간 쥐들이 사라지고, 페스트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고 페스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끝까지 리유 곁에서 힘을 보태던 타루의 죽음과, 요양소에 있던 리유의 아내의 죽음이다. 마침내 페스트(죽음)가 물러간 극적인 순간에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설정은 다분히 죽음을 상대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싸워도 결국 그것은 우리의 패배로 끝날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카뮈의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 하겠어요?"라는 대사와 같이 체념하고 죽음에 굴복하는 대신 카뮈는 리유라는 인물을 빌려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다. 샌델도 역시 ‘공동체 속의 개인은 개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함께 공동체의 가치를 결정하며, 이를 통해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린다’고 주장한다.     


결국 카뮈가 도착한 지점은 인간이 반항을 통해 ‘나’의 실존을 발견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를 넘어서 타자와 함께 서 있는 공동체로서 우리의 실존이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존재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실존을 주목했지만, 동시에 타자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 두었던 것이다. 끝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이번에는 카뮈 버전으로 각색해 보자.        


우리는 (함께)반항한다고로 (함께)존재한다!       


(*출처: The New Yorker)


이전 18화 참을 수 없는 시선의 불편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