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실존주의 시리즈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와 난 도저히 실존주의자는 될 수 없겠는데? 이거 너무 빡세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다행스럽게도 실존주의자로 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자기기만’이다.
어느 날 우연히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 보았다. ‘우와 이게 아직도 있다니.’ 반가움 반 놀라움 반에 앨범 위 가득히 쌓인 먼지를 후후 불며 털어냈다. 한 10년은 넘게 베란다 책장 한 구석에서 혼자 캄캄한 세월을 견뎌낸 것만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한 장씩 차례차례 넘기다가 6학년 4반의 페이지를 만졌을 때, 마치 지브리 스튜디오의 에니메이션 아름다운 배경음악 선율이 흐르는 것 처럼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손가락 마디 마디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지금 길거리에서 만나면 당연히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사진으로 한명 한명의 어릴 적 얼굴을 들여다 보니 25년이 지난 지금 대략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는 상상이 갔다. 그렇게 한참 새삼스런 추억에 젖어 있을 무렵,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졸업앨범의 구성은 6학년 1반부터 그룹별 단체사진과 (주로 운동장 놀이터에서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구도로 찍혀 있었다) 개인별 사진이 반별로 배치되어 있었다. 1반의 그룹별 단체사진과 개인사진이 나오고 2반, 3반, 4반 이런 식으로.
문제는 개인사진 밑에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밑 괄호 안에 장래희망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와서 다시 보니 난 그게 너무 어색했던, 아니 못마땅했다. 아니 고작 13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 짜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 군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장래희망을 고르라고 했을까?
“지금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할테니 잘 들으렴. 세상에는 A부터 Z까지의 직업이 있는데 네가 A를 고를 경우 예상되는 연봉과 행복은 이러이러하며 반면 B가 된다면 돈은 적게 벌겠지만 워라벨을 실현할 수 있단다. 하지만 C의 경우에는…”
내 기억에 이런 장래희망 컨설팅을 해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실제로 앨범에서 찾을 수 있는 직업의 폭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는데, 제일 빈번하게 눈에 띄었던 게 남자 아이들의 경우 대통령이었고, 그 다음으로 축구선수가 상위권이었다. 반면 여자 아이들은 절대 다수가 선생님을 희망했다. (참고로 지금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장 최근 설문조사에서도 운동선수, 교사가 1, 2위였고 놀랍지 않게도 크리에이터가 3위를 차지했다. 문득 운동과 교육이란 행위가 초등학생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이 뭔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남녀 구분을 떠나서 앨범 속 저 아이들은(나를 포함해서) 자기들의 실제 직업이 회사원이 될 거라는 슬픈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회사원이 된 게 문제가 아니다. 앨범 그 어디에도 회사원을 장래희망으로 적어낸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설사 그때 자기가 적어냈던 직업대로 지금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건 여전히 문제인데, 그 이유는 얼마든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13살부터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때 적어 낸 직업이 지금의 내 직업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인가?
내 이름 밑에는 의사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난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13살의 난 대체 어떤 이유로 의사가 되고 싶어 했을까? 가족 중에 의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같은 의학 드라마를 봤을리도 만무한데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내 봐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앨범 속에서 의사는 아주 평범한(?) 직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한 반에만 해도 벌써 여러명이 있었으니까. 내 바로 옆에 있던 친구의 장래희망은 무려 참모총장이었다. 참모총장이라니, 이 녀석은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있었을까? 참모총장을 장래희망으로 꼽은 것도 참 신기한데, 이순신 같은 장군이나 국방부장관 정도를 생각해야 13살짜리 스러운거 아닌가? 물론 그 친구가 정말 참모총장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현역 군인의 커리어를 걷고 있다면 언젠가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모를 일이다.
왜 우리는 세상 물정 몰라도 되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인가가 되었어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