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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1. 2023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입니다

12. 실존주의 시리즈

브렌타노에서 시작된 의식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영향을 받아 인간 실존의 조건과 죽음과 불안의 감정을 통한 본래적 삶의 실천을 주장했다면, 사르트르는 의식이란 단어가 적힌 바통을 이어받았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책 제목을 <존재와 무>라고 지었는데, 다분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의식한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인간이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시공간의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말은 곧 우리가 시간성에 묶여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무슨 뜻일까? 의식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항상 자기에게서 빠져나와서 외부의 대상을 향해 달려간다. 사르트르는 이걸 의식의 초월성이라고 업그레이드 시켜 부르는데, 의식이 매번 나를 부정하고 떠나가기 때문에(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르트르는 이걸 또 무화(無化)라고도 불렀다. 


그렇게 의식이 빠져나간 나는 무(無)와 다름없기 때문에 텅 빈 존재나 다름없다. 


후설이 그랬던 것처럼 사르트르도 데카르트를 인용하는데, 이번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로 나는 자유다라고 바꾼다.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자유인지는 잠시 뒤 설명하겠지만, 데카르트의 저 명제가 참 다양하게도 각색된다는 생각이 든다. (데카르트가 그만큼 대단한 거겠지?) 아무튼 결국 사르트르의 훌륭하지만, 몹시 어려운 책 <존재와 무>는 의식의 무에 대한 길고 복잡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늘 어딘가로 달려가는 의식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일시적인 존재다. 의식은 언제나 지나친 과거이자,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상태에 있다. 뭔가 휙휙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가? 시간 단위를 0.0000001초 단위로 쪼개보아도 의식의 현재 상태를 고정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사르트는 과거를 ‘지난-미래(past-future)’로, 미래를 ‘일어날 과거(future-past)’라고 부르는 엄청난 언어유희 감각을 보여준다. 의식은 항상 앞으로 향하고 있어서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다.      


어라? 그렇다면 ‘바벨탑이 되고자 안주를 모르는 놈’이 실존주의적으로 설명되는 거 아닌가? 항상 뭔가를 배우고, 뭐가 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벨탑 같은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인간 본성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일시적이고 초월적인 의식의 본성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만족을 누리는 일은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진짜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나? 우린 당장 앞에 있는 일만 해결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마음먹고선, 염치없게도 곧바로 새로운 목표를 갈망한다.      


난 영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명문대만 가면 내 인생이 탄탄대로만 흘러갈 줄 알았다. 에딘버러 대학교가 세계적인 명문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좋은 학교였다.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군 문제가 발목을 잡아서 해마다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입영 연기 신청을 해야 했다. 지금은 없어진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만 해도 군 미필자들은 인천공항에서 출국하기 전에 3층 오른쪽 끝 편에 있는 병역신고센터에 가서 사전 신고를 했다. 무슨 전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기분이 찝찝했다. (센터 담당자들은 어쩌면 또 그렇게 불친절했던지, 마치 지금 출국하면 영원히 안 돌아 올 것처럼 날 잠재적 병역 기피자처럼 쳐다봤다) 군대 가기 싫은 마음에 계속 학교를 다니다 보니 어찌어찌 졸업까지 해버렸고, 그래도 가기가 싫어서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가버렸다. 그러다가 이제는 정말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장교에 지원해 합격했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이지 28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다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군대에서 5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그사이 내 마음은 초심을 잃어 어떻게든 전역을 하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따는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미국도 못가고 군에 남는 것도 안 되고 이도 저도 안 되어서 길가에 나앉게 돼버렸다. 전역은 당장 3개월이 남았는데 참 막막했다. 미국 가서 공부할 거라고 취업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한 길에 몰빵하면 큰일 난다는 큰 교훈을 이때 얻었다) 한국사 자격증이나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등 남들 다 있는 그 흔한 자격증이 한 개도 없었고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토익점수도 만료된 지 이미 오래였다.) 


3개월 참 독하게 살았던 것 같다. 전역이 결정된 그다음 날 증명사진을 찍었고, 반드시 있어야 할 자격증은 다 한 번에 고득점으로 취득했다.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두 번 볼 시간 여유가 없어서였다) 매일매일 운동을 하면서 몸과 정신을 집중시켜 어떻게든 취업해서 수입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었다. 군대에 갈 때와 달리 이제는 책임져야 할 가정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몸과 정신이 건강했던 3개월이 지나갔고… 결과적으로 너무 감사하게도, 전역하는 날 아침 전역 신고를 하고 오후에 기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와 새로운 직장에 첫 출근을 했다. 아침에 입고 있던 군복은 어느새 양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양쪽 어깨 위 있었던 다이아몬드 6개의 빈자리가 참 허전하게 느껴졌었다. 이게 원래 이렇게 무거웠었나? 왜 이렇게 허전해? 돌이켜보면 장교 합격 소식보다 취업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더 울컥했는데 그만큼 늘어난 삶의 무게를 반영한 간절함이 커졌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랬던 내가… 또 정신 못 차리고 투덜이 스머프처럼 투덜투덜대고 있으니, 그 간절함은 어디로 갔는지 염치가 너무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식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데… (난 일시적인 존재다. 배째!)       

   

게다가 우린 영원히 자유롭다.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들이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 세상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란 끊임없이 선택하는 자유이며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유다. 뭐 이런 자유가 다 있나 싶은데, 맞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전혀 자유롭지 않은 자유다. 앞서 사르트르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나는 자유다’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먼저 (1)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의식이 어떻게든 나로부터 빠져나와 나를 비어 있는 상태로 내팽개치곤 자기 혼자서 미래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2) 내가 자유인 이유는 그렇게 팽개쳐져 있는 내가 가능성의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며(후설의 괄호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즉,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자유로운 것이다. 즉 내가 자유로운 이유는 내가 살찌는 거 신경 안 쓰고 마음대로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하고 싶은 걸 언제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단 말이 아니라 그냥 구조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원래 선고를 받는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거다.     


강제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선택을 내리는 것도 선택을 내리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우린 우리의 선택을 통해서만 ‘의미’를 만들 수 있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그리고 카뮈까지 실존주의자들이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과 의미 없이 내던져졌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택배 소포도 정확한 목적이 있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내가 어느 날 괴한에게 납치되어 복면이 씌워진 채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도착해보니 수천 명의 관객이 가득한 어느 공연장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생각해 보려는데, 숨죽인 관객들이 내가 공연을 빨리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이따금 들리는 기침 소리가 엄청난 적막감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아니 그런데 난 대본도 없고 내가 무슨 연기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실존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마치 이와 같다고 한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 그냥 내던져졌고, 앞으로 무슨 연기를 하든지 그건 내가 정하기 나름이라고. 심지어 그런 무대조차도 무슨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이라고 말한다. (내가 납치된 것도 하필 거기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존재하는 것은 이 우주에서 일어난 짓궂은 장난과도 같은 것이라서 우리의 존재는 여분이자 잉여인 것이다. (잉여 인간이란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사르트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잉여인간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선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가다가 불현듯 스스로가 불필요한 과잉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사르트르는 이때 우리가 메스껍고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걸 ‘구토’라고 표현했다. 스스로의 우연성이 토하고 싶을 정도라니 역겹다니. 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가끔씩 내가 왜 존재하고 왜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면 확실히 기이한 기분이 들긴 한다.      


아무튼. 무대로 다시 돌아와서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좁혀진다. (선택1)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야! 라고 소리를 지르곤 어리둥절해 있는 관객들을 두고 무대 뒤로 퇴장. (선택2) 그래? 내가 배우란 말이지? 이거 무대 위에 선 김에 그냥 한번 즐겨봐야겠군. 정해진 대본도 역할도 없다고? 좋았어. 그럼 진짜 내 맘대로 한다?      


실존주의자들의 추천은 당연히 두 번째다. 물론 첫 번째 옵션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자기 삶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아서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 즉 자살로 이어진다. 카뮈도 <시지프의 신화>에서 철학의 진정한 물음은 자살이라고 단정하면서 삶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시작했다. 물론 카뮈의 철학적 성찰이 내린 결론이 ‘오 그렇군. 삶에는 의미가 없었어. 우리 모두 자살합시다!’로 끝났으면 카뮈가 실존주의 작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카뮈는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때아닌 죽음에 더욱 의미가 빛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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