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실존주의 시리즈
그런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가?
바쁜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아침에 겨우 눈을 떠 하루종일 회사에서 업무에 시달리고 사람에 치이다 겨우 집에 들어가 눕기 바쁘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 출퇴근 길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자기개발이라도 조금 해보려는 마음에 영어 뉴스를 듣거나 책을 일으려고 해도 어느새 내 손가락은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향하고 있다. 딱히 볼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뒤적이다 내릴때가 되면 남는건 심한 멀미밖에 없다. 결국 달리는 차 안에서 보게 되는건 남들이 다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상업영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예능이나 상업영화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킬링 타임용 콘텐츠를 보다보면 도무지 생각이란걸 안하게 되고 머리가 녹스는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삶에는 두 개의 종류가 있다. 본래적 삶과 비본래적 삶. 비본래적 삶이란 잡담과 호기심, 애매성으로 가득한 삶이다. 난 아침에 안좋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눈을 뜨자 마자 핸드폰을 검색해 밤 사이에 있었던 해외축구(맨체스터)와 해외야구(다저스)의 경기결과를 확인한다. 변명을 하자면 잠을 깨우기 위해서이지만 이건 정말 변명밖에 안된다. 내가 응원하는 팀들이 이긴다고 나한테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난 왜 그렇게 열심히도 결과를 챙겨보는걸까. 그리고 또 출근해서 사무실 책상에 앉으면 정치, 사회, 경제 기사들을 훓어본다. 이런 기사들이 업무나 자기계발에 도움이 될리는 없고… 그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일하기 싫어서…
벌써 한참도 지난 일이지만 16주동안 군사 훈련을 받으러 입소를 했을 때 처음 8주동안은 핸드폰을 물론이고 TV와 신문도 못봤다. 군대 갔다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훈련을 받다보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경우(주로 부동자세로 서있거나 아님 엎드려 있거나…)가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내 인생을 가장 많이 돌아본 시간이 이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생각을 많이 했고 나란 존재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도무지 나를 돌아볼 여유와 의지가 없다. 정말 증발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앉아있거나 누어있거나, 운전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탈때나, 정말 매 순간 미디어나 광고에 노출되어 있고 머릿속은 온갖 잡다한 일상적인 것들로 가득차고 넘친다. 왜?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실존적 태도는 고단하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기란 쉽지 않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또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기엔 사는게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
일상에서 본래적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가 추천하는 처방은 ‘불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안은 귀신이나 호랑이처럼 ‘있는 것’을 무서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이다.(따라서 공포영화를 보는 것은 실존주의적 처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린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오는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데는 순서 없다고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늘 우리에게 붙어 있으며 우리는 저마다 다른 유통기한의 죽음을 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죽음을 외면한다. 마치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현상처럼 여기고 언젠간 나에게 찾아오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다가 나중에는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잊어버리며 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그들(das Man) 틈 속으로 숨어든다. 그저 남들 하는대로 따라산다는 의미다. 이걸 소속감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집단의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겠으나 본질은 남들이 하는걸 내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따라 하는 거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순간 모두 비슷한 인생경로를 걸어가고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은행이나 보험 광고였던 것 같다. 한 아기가 태어나더니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이 되고, 곧바로 군대를 가고 전역 후 취업하고 결혼하고, 다시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를 하기까지 끊임없이 뛰어가는 모습을 약 1분 동안 압축한 내용이었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내용이 재밌기도 해서 와, 하고 감탄하면서 보다가도 무척이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광고 속 만화 주인공이 달리는 길이 외길이었고 중간에 쉬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도 저렇게 처음부터 정해진 길 위헤서 숨가쁘게 달리고 있기만 한건 아닐까 두려웠다. 광고 주인공은 한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고 그에게 죽음이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 죽음이 뭐야. 죽음은 모르겠고 지금 바빠서 죽을거같아. 다음은 뭐지?!”
광고는 그렇게 주인공이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장면으로 끝이 났지만 난 그 주인공의 인생이 과연 행복했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시야를 전환해 보자. 만약 우리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면? 내가 언제라도 소멸할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우린 뒤돌아 봐야만 한다. 죽음 앞에서 더 중요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응원하는 스포트 팀이 졌다고 해서 속상해 하거나, 회사업무가 잘 안풀리고 아파트 대출이자가 올라가는 걸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마주할 때만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우리의 ‘삶’이 더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견고하다고만 생각했던 삶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불안을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불안은 부정적인 불안이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주는 중요한 동기부여이자 기회다. 죽음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남들에게 인정받거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굿 플레이스> 속 주인공들이 스스로를 소멸시키기 위해 숲속의 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을 처음 봤을땐 마음이 너무 아렸다. 그냥 폭풍 오열각이었다. 왜였을까.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은 더이상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일텐데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때의 마음상태가 쉽게 짐작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그것은 기쁨일까, 슬픔일까란 복잡한 감정은 주인공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더 복잡해 졌다. 이제 ‘영원히’ 끝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그런데 이제는 알것만 같다. 행복은 무한에 있지 않고 유한에 있다는 것을. 인생은 죽음을 마주할 때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그리고 그제서야 삶에 빛나는 의미가 생긴다는 사실을…
… 하이데거에서 이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고 보니 마음이 센치해져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김영민 교수의 말을 대신 옮겨 적는다. (내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실존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정작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중 한명이 <추석은 무엇인가>란 신문칼럼으로 유명세를 탄 김영민 교수다. 궁금하면 꼭 찾아서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한다. 지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