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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1. 2023

존재와 죽음의 필요성

8. 실존주의 시리즈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구에 내려와서 17층 꼭대기에 있는 아파트를 얻었다. 급하게 직장을 옮기느라 주말에 내려와서 집을 구한다고 구했는데, 처음 본 집이 상태도 깨끗하고 가격도 적당해서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그 집이 17층에 있는 1703호였다. 이전에 살던 군 아파트가 산속에 있는 5층이어서 그랬는지, 도심 속에 있는 17층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구 끝자락까지 모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새들이 바로 곁에서 날아다니는 것이 신기했고 공기는 산 정상에서 마시는 것처럼 신선했다. 바로 다음 주에 허겁지겁 이사하고, 새로 옮기 직장에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던 어느 날 퇴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17층을 눌렀다. 그런데 같이 탔던 여고생이 버튼을 누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잠시 고민하다가(이전에 살던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난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아하. 옆집에 사는 학생이구나! 우리 집이 1703호니까 옆집이면 당연히 1704호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아 1704호 사나 봐요? 안녕하세요. 옆집에 새로 이사를 왔어요.” 그런데 이 학생이 나를 흘깃 보더니 뾰로통하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1704호 아니고 1705호 거든요?” 정적… 그리고 문이 열렸고, 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 현관에서 삐비비빅 4자리를 누르고선 들어가 버렸다.      


(*출처: 다음부동산. 심지어 103동과 105동 사이에 104동도 없다)


당황스러웠다. 이웃사촌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삐거덕대다니. 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옆 라인이 1, 2호 라인이고, 우리 집이 3호 라인이니까 옆이면 4호일 텐데 생각을 하면서 학생이 들어간 현관문 호수를 살펴보니 아니 웬걸. 당연히 1704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1705호가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해리포터의 호그와트행 기차도 아니고 1703호와 1705호 사이에 1704호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며 집으로 들어간 난 그 일을 잊고 있다가, 1704호가 숨겨져 있던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파트에는 4호 라인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숫자 4가 죽을 사(死)를 연상시킨다고 아파트를 처음 지을 때부터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미신이 있다니. 간혹가다가 상가나 대형마트 엘리베이터를 타면 4층이 F층으로 표시되어 있는 건 봤어도 4호 라인을 통째로 건너뛴 건 처음 봤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내가 불온하게도 자기 집을 죽을 사(死)를 섞어서 불렀다고 입이 삐죽 나왔던 것인가? 이거 참.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한 내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좀 억울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는 죽음과 관련한 미신이 흔했던 것 같다. 예컨대 빨간색 펜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미신. 아마도 빨간색이 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짐작이 되는데 이건 당시 어린이들에게 꽤 강력한 미신이었다.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실수로 빨간색으로 부모님 이름을 적은 기억이 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혹시나 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하나 어디 말도 못 하고 밤잠을 설쳤던지. (참고로 지금 부모님 집 호수는 404호인데 이 집에서 몇 년째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신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에 막연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죽음이 공포(fear)는 아니다. 왜냐하면 공포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구체적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는 귀신이나 상어 혹은 600m 타워 꼭대기 등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 반면에 불안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적 상태이다. 불안(anxiety)의 어원은 매달린다는 뜻을 가진 anx인데 여기서 매달린다는 것은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등의 염려를 뜻한다.      


나는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최악의 경우에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불안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난 언제 어디서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므로 불안하다. 또한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도 불안하다.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알려진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죽음의 특징을 죽음의 필연성(반드시 죽기 때문에), 죽음의 가변성(얼마나 살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의 편재성(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으로 세분되어 있다. 모르는 것투성이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일까? 만약 진시황이 마침내 불로장생약을 구해서 영생을 얻었다면 과연 그는 행복을 얻었을까?      


이 질문에 2016년에 미국에서 방영된 <굿 플레이스>란 드라마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란 모름지기 시간을 순삭시킬만큼 재밌어야 하는데, <굿 플레이스>는 그 본질(아, 또 본질을 얘기하고 있다…)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다 인생은 이런 거야 하고 후려치는 묵직한 철학적 교훈까지 가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 한 대학의 철학 교수가 드라마 제작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이분이 쓴 책 중에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이 있다. ‘성인과 괴물 사이의 어디쯤인 보통사람을 위한 일상의 철학’이 부제인데 드라마와 책을 모두 읽으면 알겠지만 서로 딱 들어맞는 주제다. 드라마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출처: 키노라이츠)


<굿 플레이스>에는 사후 세계로 ‘굿 플레이스(=천국)’와 ‘배드 플레이스(=지옥)’가 있는데, 4명의 주인공이 4개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굿 플레이스에 가기 위한 고군분투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4명의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진짜 굿플레이스에 가는 데 성공한다. (이들이 처음 굿플레이스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굿플레이스가 아니라 서로를 괴롭히고 상처주는 것을 구경하려는 악마의 신종 지옥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고 영원한 진짜 굿플레이에 도착한 이들은 이내 실망하고 마는데 이곳에 도착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영원함’에 질려버려 마치 좀비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철학 교수였던 주인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파티에서 고대 철학자 중 한 명인 히파티아를 만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책 속에서만 봤던 철학계의 대선배를 직접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을까.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가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아래 히파티아의 대사처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굿플레이스에 있으면서 지능도, 감각도 무감각해져 버린 탓이다.     


“모든 욕구와 필요가 충족되고, 완벽이 영원토록 지속되면 사람이 멍해지고 둔해져요”.      


그토록 기다려왔던 굿 플레이스가 이럴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주인공들은 모여서 대책 회의를 안다. 고민 끝에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굿 플레이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권한, 말 그대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굿 플레이스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에 수많은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고 나서 주인공들도 하나씩, 하나씩 숲속의 어느 문을 통해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데…      


난 <굿 플레이스> 주인공들이 스스로를 소멸시키기 위해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왜일까.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은 더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일 텐데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 상태가 쉽게 짐작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그것은 기쁨일까, 슬픔일까. 


(*출처: 문화편의점. 주인공 엘리너가 마지막 문으로 들어가기 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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