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o Oct 21. 2023

하이데거(1)

9. 실존주의 시리즈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헤아리기도 전에 또 하나의 질문이 아련한 마음을 더욱 아리게한다. 존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존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바로 이 질문을 위해 여태까지 등장을 기다렸던 사람이 있다. 바로 하이데거다. 두둥하고 한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질 것만 같은 등장이다. (이름도 어딘가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만 같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하이데거란 이름은 아마 한번쯤을 들어봤을 가능성이 큰데, 논란 많은 개인사와 뛰어난 사상적 업적 때문이다. 먼저 개인사. 하이데거는 1889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1976년에 죽었는데 나치 정권의 지원을 받고 옹호한 불명예스러운 이력이 있다. 실제로 1933년 나치의 지원을 받아 프라이부르크 총장직에 올랐으며, 전국 순회 공연을 돌며 강연을 하고 마지막엔 늘 ‘히틀러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나치 지지를 철회하긴 했지만 여전히 당시 지식인과 대중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으며, 하이데거가 실제로 얼마만큼 나치를 지지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그 이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으로 유명한 유대인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복잡한 연인관계를 맺기까지 했는데(하이데거는 그때 유부남이었다) 아렌트가 미국으로 건너가 헤어졌을때도 정신적 연인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니 하이데거의 개인사는 이정도면 충분히 복잡한 것 같다.   


(*출처: 한국일보. 젊은 시절의 아렌트(좌)와 하이데거(우))

 

이제 하이데거의 사상. 하이데거를 전공하신 분께서 하신 말씀이다. 본인이 독일로 철학공부를 하러 갔을 때 절대 피해야 할 전공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헤겔이고 나머지는 하이데거였단다. 그만큼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생전에 쓴 원고들이 워낙 많아서 사후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집이 출판되고 있다. (문득 후설과 하이데거 둘 중 누구의 전집 출판이 먼저 끝날지 궁금해진다.)      


앞서 언급한 BBC 천하제일 철학왕 대회에서 하이데거는 아쉽게도 10위권이 아닌 최종 20인 후보에 들었다. 하이데거가 현대철학에 남긴 어마어마한 업적을 생각해보면 좀 박한 순위라고 생각되는데 한때 나치의 조력자였던 경력이 큰 흠집으로 작용한게 아닌가 싶다. 그도 그럴게 하이데거는 1927년 <존재와 시간>을 출판하면서 당대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등극했는데,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 뿐 아니라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현대철학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확고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의 첫 단추를 꿰멘 사람을 굳이 한사람만 꼽아야 한다면 그 자리는 분명 하이데거의 차지일 것이다.     

 

하이데거와 가장 많이 붙어 다니는 연관검색어는 ‘존재’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동안의 철학이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 구별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볼 때 존재와 존재자는 너무나도 다른데, 플라톤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철학자가 이 둘을 동의어 취급을 했다는 문제제기다. 어 그런데 존재와 존재자를 막상 떠올려보면 이둘이 뭐가 다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노래에 “처음부터 너란 존재는 내게 없었어…”란 가사가 있다. 여기에 존재 대신에 존재자를 대신 넣어서 “처음부터 너란 존재자는 내게 없었어…” 라고 노래를 부르면 몹시 어색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존재와 존재자 중 직관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것은 존재자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아렌트도 존재자고, 독일이란 나라도 존재자다. 우리가 읽고 쓰고 있는 책과 노트북과 같은 사물도 존재자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도 존재자다. ~은 ~이다라고 할 때, ~에 들어가는 모든 것이 존재자인 셈이다.      


반면에 존재는 조금 어렵다. 존재란 있음이며, 존재자를 있게 해주는 근거이자 조건이다. 그리고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과 같은 실체를 지니지 않는다. 존재자가 신체라면 존재는 영혼이라고나 할까.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는 죽어 있는 몸일 뿐이다.      


존재는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마치 영혼이 신체 속 어딘가 깊은 곳에 푹 눌러앉아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만 하듯이. 그래서 존재는 스스로 드러나지도, 다른 대상을 가리키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하나 뜯어서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는 느끼고 이해해야 하는 것에 가깝다. 존재자를 분석하는 접근방식으론 존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가 관심을 가진 시나 예술의 사유방식을 통해서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 시는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으면서도 은유를 통해 상상의 바람을 일으켜 공감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존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데 그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그런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현존재란 어려운 이름을 붙였다. 더 어색해 지겠지만 하이데거 식으로 하자면 “처음부터 너란 현존재는 내게 없었어…” 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이 실존에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실존이란 존재의 의미를 묻는 태도와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가 이를 변용해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는데 사실상 같은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은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며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왜 이 세상에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Dasein)의 어원은 거기(Da)에 있음(Sein)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존재라고 표현하는데 그러니까 거기에 있다라는 말은 인간은 항상 어떤 상황 속에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도 이후 실존주의 초석을 닦는데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당시 인간을 바라보는 인식이 이성적이니, 합리적이니 등등 인간의 특징을 보편적인 속성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볼때 개별 인간이 처한 상황은 모두가 달랐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각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전 09화 존재와 죽음의 필요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