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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1. 2023

현상학: 후설과 의식의 지향성

7. 실존주의 시리즈 

실존주의의 본질은 ‘본질이란 없다’ 일 텐데 그런데도 철학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을 때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는 에드문드 후설이다. 사실 후설은 그렇게까지 유명한 철학자는 아니다. 아마 처음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거 같다. 심지어 후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연구>가 국내 번역되어 출판된 게 2018년이니 후설에 대한 인지도나 연구가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천하제일 철학왕 BBC 대회에서도 후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후설은 19세기 중반 유대인으로 태어났는데, 나치 독일 집권 시기 핍박을 받으면서도 평생 학문과 씨름한 전형적인 학자였다. 스테레오타입이란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안경을 끼고 있는 후설의 사진을 보면 아, 교수님이구나… D+를 주실 바에는 차라리 F를 달라, 그래서 재수강하겠다는 요청 따위는 가볍게 뭉개버릴 것 같은 엄격함과 깐깐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후설은 죽기 전 “나는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평생을 철학자의 전형처럼 살았다. 수업 중에 학생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시간이나 혼자 강의를 이어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본 과분한 경험이 있는데, 가끔 마치는 종이 울리고 나서도 수업을 계속하면서 학생들이 피 같은 쉬는 시간이 줄어드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걸 보는 고약한 취미가 있었다. 후설 때 학생들이라고 그 마음이 달랐을까.)  

(*출처: 위키피디아)


후설은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남기기도 했는데 계산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략 5만~7만 페이지라고 한다. 지금도 계속 후설 전집이 출간되고 있고 2020년까지 총 43권이 출간되었으나 이 양이 전체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린 아직 후설에 대해 한참이나 모르는 것이 많다. 앞서 후설이 현상학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현상학 없이는 실존주의를 말할 수 없으므로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 후설이 중요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후설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었을 때 데리고 있었던 조교가 하이데거였다. 맞다, 그 하이데거다. 그러니까 실존주의의 계보가 후설에서 시작해서 하이데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다가 다시 사르트르와 카뮈에게로 넘어가는 구조인 셈이다. (물론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실존주의자가 더 많다.)


그렇다고 후설이 처음부터 현상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아니, 심지어 철학자도 아니었고 원래 전공이 수학이었다. 그러다가 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아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후설이 활동했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은 근대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콩트 등의 학자로 대표되는 실증주의가 위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즉, 이론과 가설 그리고 실험으로 무장한 과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반대로 여전히 맑은 하늘에 흘러가는 뜬구름같은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던 철학은 점차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런 기류에 힘입어 등장한 심리학은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차용해 철학의 고유 영역이었던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학계의 매력적인 다크호스였다.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주목받으면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코딩과 데이터분석을 배우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철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설이 보기에 철학은 여전히 중요했고, 모든 학문의 토대였다. 따지고 보면 후설이 평생을 거쳐 현상학 연구에 몰두했던 이유는 위기에 빠진 철학을 구출하기 위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학문의 공통점은 특정한 대상을 분석한다는 데 있다. 자연과학은 입자, 생물, 물리, 대기, 우주 등 자연 전반에 존재하는 실체적 대상을 분석하며, 사회과학은 법이나 언어, 민주주의 이념 같은 인간이 만들어 낸 비실체적 대상을 분석한다. 공통점이 또 있다. 어떤 대상을 분석하든지 간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고,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에 의해 탐구되지 않는 학문 분야는 없다) 이러한 의식 활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아야 할 주체는 여전히 철학이라고 후설은 생각했다.  

   

여기까지가 대략 후설의 현상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인데, 이후 후설의 문제의식은 대상이 어떻게 의식에게 주어지는가?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로 이어졌다. 이 구조를 먼저 온전히 파악해야만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에 정확히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설이 먼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 것은 현상의 중요성이었다. 이후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도 그랬듯이 후설 또한 이 세상에는 현상만 있을 뿐 배후의 본질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이 중요한데 그동안의 철학은 보이지도 않는 본질을 밝히려고만 했다. 직무급의 사례에서처럼 현상은 분명 하나인데, 이걸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해석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답은 의식의 지향성과 능동성에 있다. 우리의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특정한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과 대상을 하나의 세트라고 생각해도 좋다. 의식 없는 대상은 없으며 대상이 없는 의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막간을 이용한 중간 퀴즈 하나.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 이때 '쿵' 하는 소리가 났을까? 보통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질문을 할 때는 당연하지 않은 선택지가 정답인 경우가 많은데 이 퀴즈도 그렇다. 쿵, 털썩, 픽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물을 수 있지만, 현상학자들이 볼 때는 맞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 숲속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의식도 없었고, 의식이 없는 대상은 사르트르가 말한 ‘획일적 존재’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틀린 명제였다. 생각하다니, 무엇을? 후설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무엇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맞다.            


자, 이제 의식과 대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건 알겠다. 그런데 직무급의 경우처럼 왜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걸까? 핵심은 각각의 부서가 직무급이란 현상에 부여하는 의미가 달라서다. 직무급은 ‘직무’와 ‘급’, 즉 직무와 급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영어로 하면 wage based on job function인데 wage가 더 중요한지, job function이 더 우선인지를 두고 다른 인식이 있는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어떤 현상은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으로 주어지는데 이 말은 그 현상의 ‘의미’가 우리의 ‘의식’과 만난다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란 친구는 매우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어서,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경험, 기억, 감정, 세계관, 심지어 타인과의 관계 등의 필터를 거쳐 늘 새롭게 재해석한다. 그래서 각각의 의미를 부여한다. ‘저 부서 사람들 요즘 일도 별로 없고 노는 거 같던데, 이참에 직무급이나 좀 맡아서 하지’란 생각이 든다면 이건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는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또 우리는 은연중에 ‘당연히’란 끼워 넣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직무급은 본질은 직무니까 당연히 A팀 일이지.’, ‘직무급은 월급을 주는 거니까 당연히 B팀이지.’ ‘직무급은 경영평가 잘 받으려고 하는 거니까 당연히 C팀이 좀 맡아서 해야지.’ 나도 모르게 당연히를 수식어로 사용하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난 지금 현상을 굉장히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당연하다는 굉장히 좁은 사고의 프레임에 갇혀, 어떤 현상이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무급 같은 경우야 핑퐁 게임으로 어찌어찌 해결될 수 있다 치더라도(과정에서 감정이 상해서 그렇진 누군가는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 엄정한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학문의 세계에서 같은 대상을 연구자들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 큰일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내뿜어대는 이산화탄소 등으로 기후변화라는 ‘현상’이 분명한데 그걸 아니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이미 일어난 큰일을 더 큰 일로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철학 지킴이 역할을 자처한 후설의 제시방안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었다. 우린 보통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 ’란 표현을 쓴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 모두가 각각의 인식 필터를 끼고 있는데. 이 인식 필터를 벗어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인간의 구조상 안 된다.      


후설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두고 저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니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즉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가능성을 열어두자고 말한 건데 이를 사태 자체로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사태 자체로’는 후설 현상학의 강령이자 행동 강령이었는데 사태를 그 자체로 바라보려면 그동안 어떤 현상뿐 아니라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던 습관적 태도도 멈춰야 한다. 후설은 이걸 판단 중지(에포케)’라고 부르며 괄호를 친다라도도 표현한다. 즉 괄호 안은 항상 비어 있으므로 그 안을 서로 다른 것으로 채울 가능성을 열어두는 셈이다.      


따라서 후설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각자의 판단을 중지하고 사태를 최대한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결국 모든 학문이 근본적으로 취해야 할 가이드라인이자 방법론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설은 나중에 이 객관성의 개념을 극한으로까지 밀고 가서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인식 필터 자체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경험적으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선험적(先驗的)인 주장을 한 건데, 이로 인해 후설이 그토록 싫어했던 관념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들으면서 많은 이들이 후설에게서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그 중엔 카뮈도 있었다.)     


그런데도 후설이 실존주의 발전에 어마무시한 영향을 미친 건 분명하다. 판단 중지와 가능성의 영역을 발견함으로 세상이 이러이러하다, 인간의 본질은 이것 이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렇다면 인간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 갈 가능성의 영역 속에 있다라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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