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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Dec 26. 2020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Gulag Archipelago)

요새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으면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적당히 사실과 의견을 버무리면 진실이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뉴스에 진실을 외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기엔 우리가 너무나 나약해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말과 글이 다입니다. 이걸로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1940년대 구 소련에서 이와 똑같은 위기에 처해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자신의 친구와 함께 스탈린에 대해 논평하던 편지가 적발돼 10여 년 간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알렉산드로 솔제니첸'입니다. 11년간 노동교화형에 처한 작가는 그곳에서의 직접적인 체험과 감방 안에서 나눈 동료들의 진술 등 200여 명의 생존자,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수용소군도'(Gulag Archipelago)라는 책을 씁니다. 소련에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수용소가 전국 곳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작가는 그것을 '수용소군도'라고 지칭했습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위키백과

이 책은 민중들을 억압하고 감시하던 소련 공산주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낭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소련은 사람들이 협동해 농사를 짓고 필요한 만큼 분배하는 풍요로운 이상향이었죠. 일부 지식인들은 소련을 방문한 뒤 '지상낙원'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솔제니첸은 소련이 '수용소군도'를 만들어 죄 없는 사람을 가두고 고문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끊임없이 민중을 감시하는 부패한 사회라는 현실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또 수용소군도가 단순히 레닌과 스탈린과 같은 특수한 독재자들이 만든 유산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나라의 정치적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히는 작업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기록의 힘'혹은 '진실의 힘' 때문입니다. 


책은 법치주의와 언론과 같은 권력을 제어하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무너진 사회가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꼼꼼히 기록합니다. 책 초반에는 무고한 시민들이 체포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체포는 광범위하고 무자비하게 일어납니다. 친구와 무심코 얘기하는 대화나 편지 속에서, 혹은 그들이 정치범의 가족들이라는 이유 등 때문입니다. 소련 정부는 갖은 이유를 대고 이들을 체포했습니다. 

 "<당신이 체포되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을 때 당신이 그 우주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나를? 무엇 때문에?>이것은 지금까지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되풀이해 왔으면서도 아직도 그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다.(20p)" "<조사해서 무죄가 드러나면> 석방을 해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도망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저항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이웃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발끝으로 살금살금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다."(33p)


이렇게 '수용소군도'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1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고 형을 다 살기도 전에 고문을 받아 숨지거나, 병들어 죽습니다. 스탈린은 형법 58조(조국에 대한 배신)를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했습니다. 그중엔 적군에 포로로 잡힌 자도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10년형을 받고 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솔제니친은 기록하는 와중에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사건들도 종종 소개합니다. 강당에서 스탈린에 대해 박수를 치다가 가장 먼저 멈췄다고 잡혀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어 소련의 대숙청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그중에는 고려인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장면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탈린은 1948~1949년 사이 '반복 수청'을 진행했다. 1937년에 숙청된 사람들의 10년 형기가 끝나자 본토로 돌아온 사람들을 다시 수용소로 잡아넣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라고 묻지 않았고 가족에게 '곧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대화는 간단했다. "10년만 더 받시오". 스탈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10대 아이들과 군사령관의 아이들까지 모조리 잡아갔다.>" (141p) 

이들이 잡혀가는 데에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일상이었죠. 그럼에도 아무도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미 공동체는 산산조각 났고, 정부에 의해 감시받는 군중들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소련의 강제수용소가 어떻게 관료화되고 체계화되는지를 소개합니다. "<소련에는 정식 재판제도보다 특심 제도를 이용해 피고인을 판결했다. 즉심 재판소의 판결은 물론 인원 구성은 비공개였고, 피고인은 수용소에서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5년형 판결만 가능했던 것이 10년 15년 총살까지 확대됐다.>  <1937년의 훈령은 10년, 20년, 총상형이었다. 1943년의 훈령은 누구나 10년형에다 5년의 권리 박탈이 부가됐다. 199년 훈령은 모두 하나같이 25년형이었다.>" (429p) 

 권력이 사법부까지 장악하면 어떤 사회가 되는지 귀감이 되는 부분입니다. 독재권력이 왜 사법부와 준사법기관인 검찰을 길들이려 하는지도 우회적으로나마 알게 됩니다. 


솔제니첸은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비겁함 때문에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사 내에서 진실을 얘기하고 싶어도 위계에 눌려 뒷걸음질 친다거나, 상사의 압박에 굴해 거짓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진실을 말해야할 순간이 옵니다. 솔제니친은 "세상에 거짓이 존재해도 놔두라. 거짓이 승리하더라도 그대로 두라. 다만 나를 통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지는 말라."고 말했습니다. 때론 눈을 감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고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말과 글의 힘은 강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진실대로 말하면 적어도 한 명의 동료나 친구를 설득할 수 있고, 그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솔제니친이 펜으로 수용소군도를 무너뜨린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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