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역작 '죄와벌'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이름 앞에는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뛰어난 소설가는 많지만 '대문호'가 붙은 소설가는 톨스토이와 빅토르 위고 정도 아닐까요? 오늘 소개하고 싶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역작 '죄와 벌'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입니다. 그가 살던 19세기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해 산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입니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발견은 신의 존재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죠.
도스토옙스키는 이 생각을 극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에 도달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윤리와 도덕, 법률이라는 것이 전부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새로운 도덕과 윤리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신이라고 말하면 거창해 보이는데 '절대적 진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 눈에는 그가 19세기에 던진 질문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까지 유효한 듯 보입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가슴에 품고 하느님의 뜻(절대적 진리)만 따르면 됐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어떻습니까. 20세기는 수많은 진리가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어떤 영원한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가 없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말과 같습니다. 선택의 수가 너무나 많아지고, 그 선택의 확신도 사라집니다. 이럴 땐 인간이 어떻게 될까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몰라 불안에 떨까요? 허무주의에 빠질까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될까요? 아니면 철학자 니체의 말을 빌려 모든 것을 초월한 '초인'이 될 수 있을까요. 도스토옙스키를 '대문호'의 반열로 올려놓은 질문입니다.
소설 '죄와 벌'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대학생 라스콜니코프, 성스러운 매춘부 소냐, 악인 스비드비가일로프입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나폴레옹' 같은 사람인지 시험하기 위해 고리대금 노파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죽인 광기의 법학도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 골방에 자신을 유폐한 채 시간을 보내던 중에 한 가지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마을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녀의 돈을 모두 갈취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는 등 좌절감을 느껴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면 악독한 노파의 죽음이 무엇이 문제인가하는 게 그의 문제의식입니다.
그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단순히 돈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오직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세상 만들기를 시험해 보는 겁니다.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나는 그때 내가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내야만 했어, (중략) 내가 넘어설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 지를!"(5부, 263쪽).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은 윤리와는 거리가 멀게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숱하게 죽이면서 '대의'를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처럼 라스콜니코프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를 시험합니다. 그가 만약 비범한 사람이라면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죄 없는 리자베타를 살해했더라도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예기치 않은 불안감과 자책을 느끼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불안감 속에 정신착란을 일으키던 그는 매춘부 소냐를 만나게 되고 결국 죄를 실토하게 됩니다. 소냐는 8등 관리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의 알코올 의존증 등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연명합니다. 그는 신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고백을 듣고 자수할 것을 권유하고 , 그는 경찰서에 들어가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자신이 죽였노라고 말합니다.
'죄와 벌'에서 소냐가 천사를 상징한다면 두냐(라스콜니코스의 여동생)가 가정교사로 일했던 집의 가장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악마를 상징합니다. 스비드리가일로는 정념과 욕망이라는 육체의 노예입니다. 50세가 넘은 그는 두냐를 탐하기도 했다가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기도 합니다. 그는 두냐를 라스콜니코프의 죄를 모두 발설한다는 말로 협박했지만, 먹혀들지 않자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어찌 보면 현대인의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질이 풍족해 육체적인 탐욕에 침잠하다가 정신적인 갈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8년형을 선도받은 뒤 유형지에서도 자신 혐오감에 빠집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에 대한 굴욕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을 주는 소냐를 바라보면서 다시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시 키워가겠다는 다짐이자, 이 세계와의 화해의 제스처이죠. 논리와 이성 대신 삶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식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어쨌든 신의 굴레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사실 '용두사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거창한 문제 인식에서 시작해 결국 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니까요.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 스스로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진리를 만드는 '넘어섬'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인 거죠. '보수주의'라는 비판도 더러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문을 연 19세기가 결국 막을 내리고 다시 영성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했을까요? 이성과 논리에 부풀어 오르던 20세기 중반에 세계 1,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이 죽어간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