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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Aug 10. 2020

내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 이야기

문득 내가 우리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바라보는 나'를 떠올리며 글을 적어 본다.


[중2 여름, 사춘기]

똘똘하고 착하기만 했던 큰 딸이 최근 들어 내 속을 썩여도 너무 썩인다. 내가 무슨 말만 할라치면 화낼 준비가 되어있다. 얼굴엔 짜증이 한가득이다.

오늘 아침엔 늦었는데 아침밥을 한 술 뜨고 가라 했더니 짜증을 잔뜩 내며 나가버렸다. 나는 아침부터 첫째가 좋아하는 가지볶음이랑 오징어채랑 바로 만들어서 먹게 하려고 한 건데... 본인이 계속 깨워도 못 일어나서 늦었는데 괜히 나한테 지각의 화살이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가니 책상에 문제집들이 잔뜩 널려있다. 사달라고 해놓고 하나도 풀어놓지 않았다. 뭐라고 하고 싶은데, 뭐라고 했다가는 또 싸울 것 같아서 열을 삭힌다.

지난 주말엔 아이와 큰소리로 싸웠다. 첫째가 소파에 누워있길래 그냥 별 뜻 없이 웃으며 '요즘 완전 소파랑 한 몸이네?' 한 마디 건넨 것뿐인데 갑자기 벌컥 화를 냈다. '엄마는 내가 누워있는 꼴을 못 보지? 엄마는 그렇게 공부가 최고야? 그렇게 비꼬면서 말하면 엄마 속이 편해??'

그러더니 동생들한테는 뭐라 안 하면서 자기에겐 엄격하다느니, 다른 친구들 중에는 엄마처럼 엄격한 사람은 없다느니, 엄마는 집에서 계속 쉬고 있으면서...라고 다다다다 쏟아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나도 화가 폭발해서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사춘기가 되면 힘들다고 하던데, 이런 시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최근 몸이 너무 아픈데, 첫째를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도 너무 아프다.

특히 '엄마는 집에서 쉬고 있으면서...'라는 말이 맴돈다. 나도 한때는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번듯하게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을 보며 행복했었는데... 내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나는 뭐지? 나도 우리 애들처럼 꿈을 꿀 때가 있었는데...


[고1 3월, 입학]

오늘은 첫째가 하원을 하고 펑펑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당장 자퇴를 하겠다고 난리였다.

고등학교 평준화가 되어 뺑뺑이 배정을 했는데, 첫째만 친구들과 동떨어져 먼 거리의 학교에 배정이 됐다. 그런데 오늘 야자가 끝나고 원래 타던 버스 막차를 놓쳤단다. 게다가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버리고. 가뜩이나 아직 친구도 없고 낯선 동네, 낯선 학교 분위기에 힘들어했는데 오늘 터져버린 것이다.

아이를 겨우 달래 재우고 남편과 침대에 누웠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 운전면허 따."

세상에서 겁이 제일 많고 운전 조수석에 타는 것도 힘든 나에게 운전이라니? 운전이라고? 난 못해. 정말 못해.

"그래도 00이 저렇게 둘 거야? 당신 운전하면 오늘 같은 날 데리러 갈 수 있잖아."

그래... 못할 게 어디 있나. 내일 당장 면허학원을 등록하기로 했다.


[28세 봄, 출산]

00 이가 아기를 출산했다. 본인이 낳은 아이가 신기한지 신생아 카트 속 아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00 이는 결국 응급으로 수술해서 아기를 낳았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출산해서 다행이다. 00 이를 보니 아기를 낳느라 힘들었는지 얼굴도 몸도 퉁퉁 부었다.

방금 남편도 연락이 왔다. 00이 안부부터 묻는다. 00 이도, 아기도 건강하다 하니 안도의 한숨이 전해진다. 나와 남편이 할머니, 할아버지라니. 그리고 우리 아이가 엄마라니. 기분이 참... 형언하기 어렵다.

내가 걸어온 길을 우리 아이도 걷게 될까. 힘들겠지만... 더 행복한 일들이 많겠지. 내 딸은 나보다 더 현명하게, 행복하게, 당차게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 믿는다.


사춘기 시절, 나쁜 일이지만 엄마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나는 어디 있지? 내가 꿈꾸던 삶은 어디 있지?'와 같은 문구가 기억이 남는다. 그 당시 나는 일부러 엄마의 가슴에 비수가 되는 말들을 잔뜩 던졌다. 죄송하다는 생각보다는 엄마는 날 왜 이해 못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더 컸던 시기였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엄마는 운전면허를 땄다. 우주 최강 쫄보 엄마는 면허를 따고 우리 집 - 고등학교 이 거리만 도로연수 100시간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후 내가 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날이면 나를 데리러 왔다. 당시 우리 학교는 산 중턱에 있고 주차할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는 나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와서 가장 좋은 자리에 차를 대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첫째를 출산하던 때, 유도분만을 2일간 해도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열이 나서 계속 타이레놀이 처방됐다. 엄마가 나랑 통화를 하고 걱정이 되셨는지 1시간 반 거리를 헐레벌떡 달려오셨다. 진통 수치는 거의 없었는데 몸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냥 수술로 아기를 낳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아기를 낳는 게 원래 아픈 거라며 좀 참으라 했다. 그런데 나를 보던 엄마가 의사 선생님을 찾더니 뭔가 이상하다며 수술을 시켜달라 했다.

반신 마취를 하고 아기를 꺼내는 순간 의사가 "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알고 보니 탯줄이 목에 꽉 감겨 있었던 것. 게다가 아기는 예상보다 머리도 크고 체중도 더 나가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체구로는 자연분만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큰일 날 뻔했어요." 나도, 의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왜 수술하자고 했어? 물어보니 그냥 딱 그래야 할 것 같았단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엄마처럼은 살 수 없다고. 엄마처럼 살기 싫다는 게 아니라 엄마처럼 부지런하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누구보다 현명하고 인내하며 삶을 꾸려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종종 엄마가 했던 행동과 말들이 나에게서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땐 '혹시' 하고 생각해본다. 나도 아이들에게 우리 엄마와 같은 엄마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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