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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Nov 12. 2020

무라카미 하루키의 착각

보고서를 쓴다는 것

얼마 전 '보고서의 법칙(백승권 저, 바다출판사)'이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었다. 잠깐 그 내용을 소개해본다.(내용의 소제목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착각'이라서 블로그의 제목도 책 내용에서 따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늘 재미있게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대학원생으로 리포트, 발표 원고, 교수님께 보내는 이메일, 편지 등 어쨌든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글 쓰는 게 너무 형편없습니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낑낑대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좀더 쉽게 쓸 수 있을까요."


하루키는 대답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자를 말로 유혹하는 것과 같아서 어느 정도까지는 연습으로 잘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재능을 타고나야 합니다. 뭐 어쨌든 열심히 하세요"


하루키의 대답은 "어느 정도까지는 연습으로 잘하게 되지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재능을 타고나야 합니다."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이 대답이 언론에 공개되자 하루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중략)



작가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내용, 구성, 문장을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작업은 남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베끼거나 되풀이할 수 없습니다. 창조성과 비반복성이 문학의 심장입니다. 하루키는 그런 이유로 재능 없이 후천적 노력만으로 (직업적) 문학을 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키는 왜 비난을 샀을까요? 하루키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사쿠라이의 질문을 문학 창작의 잣대로 재단하고 리포트, 발표 원고, 이메일, 편지 작성의 문제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문학 글쓰기와 실용 글쓰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그것을 똑같이 다룬 것입니다.





제시된 일화도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작가의 관점도 좋았고 이를 통해 나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회사 동료 중 한 명이 생각이 났다.



그 동료는 글을 잘 못 썼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보고 전에 친한 동기들한테 검토를 해 달라고 했는데 글에는 문맥과 맞지 않는 단어와 비문이 남발했다. (참고로 나는 그 친한 동기 중 한 명이었다.) 당시엔 나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여서 잘함을 논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동료가 잘 못 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냥 '글 못 쓰는 사람'으로 본인도, 주변 사람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1년 휴직 후 회사에 돌아왔을 때 들은 소식은 놀라웠다. 그 직원은 보고서 분야에서 회사의 에이스가 되었다. 그의 보고서는 주변 동료들뿐 아니라 상사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회사의 대부분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하루키처럼 글은 기본적으로 재능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불과 1~2년 사이에 글 솜씨가 일취월장했다고?' 그렇지만 그 동료의 보고서를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보던 그의 보고서가 아니었다. 보고서는 깔끔하면서도 화려했다. 양식은 지키고 흐름은 유지하되, 동일한 내용을 다양한 단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이동한 부서의 사수에게 1년간 스파르타로 배웠다고 했다. 회사에서 잘한다는 선배들의 보고서들을 뒤적거리며 노하우를 배우고, 본인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단시간에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보고서의 법칙을 쓴 저자의 말처럼, 보고서를 쓰는 건 일반 문학작품을 쓰는 것과는 달랐다. 물론 일반 글도 열심히 쓴다면 어느 경지에는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는 재능이 없어도 어느 수준이 아닌 최고 수준에도 다다를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인 사례였다. 


더불어 그 동료는 나중에 선배들보다도 잘 쓴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일에 대한 애정인 것 같다. (나를 포함) 많은 회사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일이 지치고, 힘들고, 재미도 없어한다. 그런데 그 동료는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회사 일을 다양한 각도에서 깊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같은 사업의 내용을 풍성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 같다.


보고서의 시즌이 되면서 다양한 보고서를 읽고 다양한 보고서를 쓰고 있다. 얼마 전 후배 한 명이 '저는 정말 글은 못 쓰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엉망인 보고서 초안을 내밀었다. 나도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므로 그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직장인은, (특히 우리 회사에서는) 보고서는 숙명이다. 일반 글쓰기와 달리 쓸수록 늘 수 있다. 그래서 나도 포기하지 않고 단련 중에 있다. 이 이야기를 그 후배에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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