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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Nov 24. 2020

책 냄새가 좋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엄마 친구 딸, 갓 대학을 입학한 언니에게 수학을 배웠다.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고 언니도 날 스스럼없이 대했지만, 나는 항상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수학보다는 책이 먼저 생각난다. 선생님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큼지막했고, 그 안에는 항상 짐이 많았다. 가방 안에는 수업 시간에 쓰는 문제집들과, 본인이 읽고 있는 책들이 들어있었다.


선생님의 책들은 매번 달랐다. 그중에는 영어로만 되어있는 책도 있었고, 사진들로만 이루어진 책도 있었다. 얇은 잡지도 있었고,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힌 두꺼운 책들도 있었다. 중학생인 나에게 대학생인 선생님은 우상 그 자체였다. 나는 가방 사이에 보이는 책들을 흘끔흘끔 보기도 하고, 가끔은 어떤 책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그 책(혹은 잡지) 이름을 내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다. 나도 대학생이 되면 꼭 읽어봐야지, 다짐하면서.


선생님은 가끔씩 자체 테스트란 명목으로 시간을 정해주고 나에게 여러 개의 문제를 풀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옆에서 책을 읽으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럽고, 얼마나 얄밉던지. 그날도 끙끙거리며 문제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옆에 계시던 선생님이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그 책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놀라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뭐 하시는 거지? 내 표정에서 질문을 읽으셨는지,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난 말이야, 책 냄새가 참 좋더라.”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책은 책마다 고유의 향기가 있다고 했다. 아마 선생님이 말한 책 냄새는 책의 종이와 잉크가 어우러진, 화학물질들이 조합해서 만들어 낸 냄새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을 동경하던 나는 얼마 뒤 책 냄새에 매료되고 말았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다가 살며시 코를 가져다 대보곤 했다. 책 냄새는 그 어떤 냄새보다도 우아하고 멋진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향기, 값비싼 화장품의 냄새 그 무엇보다도 책 냄새를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영향이 남아있어서인지, 가끔씩 나는 책 냄새를 맡아본다. 새 책은 새 책 냄새가 난다. 오래된 책은 뭔가 어스름한 냄새가 난다. 강한 냄새가 나는 책도 있고, 아주 희미하고 흐릿한 냄새가 나는 책도 있다. 손에 들린 책의 무게와, 책의 고유한 향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책 냄새는 내가 전자책 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책은 각자의 냄새를 가진다. 누군가는 같은 출판사, 같은 규격, 같은 종이 재질의 책이라면 책 냄새가 동일하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책들마저도 책 냄새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책 냄새란 물리적인 냄새뿐 아니라 책의 내용, 만나게 된 계기, 나에게 준 느낌 등 정서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생겨나는 냄새다. 그래서 책은 각 책마다 고유한 냄새를 가질 수밖에 없다. 독서는 그런 책의 고유한 냄새를 내 것으로 체득하는 과정이다.


고유한 냄새를 가진 게 어디 책뿐일까 싶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과, 살아온 과정을 통해서 각기 다른 향을 풍긴다. 사는 과정에 따라 그 냄새는 변한다. 문득 내 고유의 향은 어떻게 정의될지 궁금해진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들꽃처럼 잔잔했으면 좋겠다.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뜨겁고 인상적인 향은 아니어도 딱 마시기 좋은 차의 온도처럼 따뜻하고 은은한 향을 풍기는 사람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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