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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Dec 31. 2020

1호선 지하철의 추억

사람들의 삶을 싣고 달린다

두 달 전, 오랜만에 서울에 갔었다. 서울역에서 신도림으로 향하는 1호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에는 그리 자주 타던 지하철이었는데, 지하철이 없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이 다소 생경했다. 지하철 내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익숙하고도 새로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의 20대는 언제나 수도권 지하철과 함께였다. 특히 파란색 라인의 1호선은 각별한 존재였다. 대학생이었을 땐 1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갈아탄 뒤 2호선으로 갈아타고 학교로 향했다. 영어학원에 다닐 때면 신도림을 지나쳐 종로3가역에서 내렸고, MT를 갈 때면 종로를 지나쳐 청량리까지 갔다.


아침 수업이 있는 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지하철을 탔다. 그 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출퇴근 시간에 타는 급행 지하철은 사람들이 더는 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밀고 또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지하철 파업 기간 때보다는 양호했다. 파업 기간의 지하철은, ‘사람이 압사로도 죽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구나를 몸소 실감하게 했다.


여름의 지하철은 꿉꿉한 땀 냄새가 났다. 밤늦게 타는 지하철에는 술 냄새가 났다. 다양한 사람들, 냄새, 불빛, 소음들이 날 둘러쌌다. 머피의 법칙처럼 짐이 많고 피곤한 날일수록 지하철에는 앉을자리가 없었다. 손잡이 하나에 내 몸을 다 의지한 채 차라리 버스를 탈 걸 그랬다며 내 선택을 원망하곤 했다.


입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사실 지하철이 싫지 않았다. 길치이고 뚜벅이였던 나에게는 지하철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근처에 지하철역만 있다면 어떤 약속 장소도 두렵지 않았다. 지하철 여정이 긴 날일지라도 책과 음악이 동행하면 괜찮았다. 이상하게 지하철에서는 유독 책이 잘 읽혔다. 그래서 어떤 날은 일부러 책 몇 권을 가방에 넣고 부천에서 소요산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 없이 그냥 책을 읽기 위해 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지하철 한 량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노량진에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도 두꺼운 책을 들고 타는 사람, 각진 양복과 달리 풀어진 모습으로 꾸벅꾸벅 조는 사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킬킬거리는 사람, 누가 봐도 술에 취해 벌건 모습을 하고 손으로 계속 얼굴을 훑어내리는 사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애정이 어린 눈빛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며 삶을 읽고 감정을 읽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작은 인연을 맺은 셈이다.


코로나로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하철 안에 쪼르륵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한때는 너무 평범했고 지겨웠던 지하철의 일상이, 이제는 탈 일이 없으니 그리움으로 변해버렸다. 나만의 이동수단인 자동차도 생겼건만, 함께 한 시간의 탓인지 아직 마음은 지하철에 남아있다.


그렇게 추억에 젖어 있다 보니 어느새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항상 북적북적했던 신도림은 시간 탓인지, 코로나 탓인지 예전보다 사람이 적었다. 급행 노선의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날은 신도림이 종착지였는데도, 괜스레 동인천 급행 옆에 '당역 접근'이라는 글자가 뜨니 서둘러 뛰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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