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떡 Jan 28. 2021

할머니와 뽀글머리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귤 농사를 지으셨다.


엄마가 동생을 낳을 무렵, 나는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귤을 수확할 시즌이라 함께 귤 밭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정신없이 귤을 따시다가 갑자기 내가 안 보여서 나를 찾으셨다. 다섯 살의 나는 저쪽 구석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할머니가 따 둔 귤들을 옆 밭에 열심히 던지고 있었단다. 가족들은 모이면 종종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당시엔 대를 이을 손자가 중요했던 시절인데, 할머니에게 대놓고 차별받은 기억은 없다.(엄마의 기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저 나에게 할머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혼난 날이면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울면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나이가 드시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셨다. 온 가족들이 고민한 끝에 할머니를 우리 집 근처로 모셨다. 의사가 상주해 있는 요양병원이었는데, 엄마는 2~3일에 한 번씩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병원에 가 보았다.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는 내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알던 할머니의 모습은 두툼하게 짜인 카디건을 입고 까맣게 염색한 뽀글뽀글 파마머리였다. 하지만 병원에는 뽀글머리의 할머니 대신 하얗고 짧은 생머리의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날 보며 수줍게 웃는 할머니가 다소 낯설면서도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느 날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서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셨다.


"00아~ 00아~"


뭐라고 말씀하실지 더 듣고 싶었는데 잠에서 깼다.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을 먹다가 엄마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갑자기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그날은 엄마가 병원에 가는 날이 아니었다. 내 꿈이 의미가 있겠어? 엄마가 좀 유난이다 싶으면서도, 병원에 가고 싶다는 엄마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장례식장에서 내 꿈은 큰 화두가 되어 있었다. 고모들은 나에게 물어봤다. 네 이름만 불렀어? 혹시 나나 우리 애들 이름은 안 불렀니? 다들 신기한 꿈이라고 했다. 내 꿈으로 인해 엄마는 임종을 지킨 사람이 되었고, 내 꿈 덕분에 나는 뭔가 각별한 손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내 꿈보다 내 이야기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엄마가 더 신기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슬프기보다는 뭔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장례식장이 낯설었고, 할머니의 죽음이 낯설었다. 그나마 낯설지 않았던 것은 영정사진 속 뽀글머리의 할머니 모습이었다.



어릴 때는 생각했다. 우리 할머니는 왜 항상 머리가 검을까? 저 파마의 곱슬은 저리도 잘게 꼬불거릴까? 이제야 추측해보건대 가족들이 다 모이는 명절을 앞두고서 단장을 하신 것 같다. 바쁜 와중에도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시고 염색을 하신 거겠지.


내 기억 속의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철없는 이 손녀는 지금도 힘들 때만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 다른 세상에서 지내고 계신 할머니는 그곳에서도 뽀글뽀글 파마머리이실 것만 같다. 그 모습으로 '우리 손주 장허다, 장허다' 하고 칭찬만 한 가득해주시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별 볼일 있던 날들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