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떡 Feb 16. 2021

계산기를 두드리며

나는 돈 관리를 잘 못하는 편이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주는 점수는 의외로 야박하지 않다. 일단 남편보다는 잘 관리하고, 거액의 물건을 잘 사지 않으며, 일 년 단위로 봤을 때 계획만큼 저축과 소비가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축 계획을 작게, 소비 계획을 크게 잡는다는 것은 논외로 하자.)


문제는 작은 돈 관리가 잘 안된다는 점이다. 꼭 지출해야 하는 돈을 빼놓고 나면 남는 돈들은 맘 편히 쓴다. 그러다 보니 이번 달 카드값이 얼마인지 모를 때가 있다. 적은 달도 있고, 많은 달도 있다. 통장에 잔액이 있는지만 확인하는 정도다. 가계부를 몇 번 써보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숫자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작은 숫자에 집착해서 스스로를 들들 볶기 때문이다.


그런 나도 매달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시기가 있다. 바로 휴직기간이다. 올해 1월부터 남편이 다시 육아휴직을 냈다. 원체 나와 남편의 월급이 많은 편도 아닌데 그마저도 반 토막이 났다.(정확히 말하면 반보다 더 많이 줄었다. 남편의 월급이 나보다 조금 더 높으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1월에는 평소처럼 지출을 했다가 2월에 돼서야 아차, 싶어 공책 한 권과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타닥. 계산기에 고정 수입을 입력한다. 그리고 마이너스(-) 버튼을 누르고 고정 지출을 하나씩 덜어낸다. 관리비와 통신비, 타닥. 대출이자와 원금, 타닥. 보험비와 공제회비, 타닥. 계산기 소리는 이리도 경쾌한데, 내 마음의 소리는 그리도 우울할 수가 없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들이 이렇게 많다니. 분명 내가 쓰는 돈인데 내가 쓰는 돈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은 뭘까.


이제 변동 지출을 계산해 볼 차례다. 손이 더 분주해진다. 각종 은행 앱과 카드 앱, 영수증 카톡을 열어본다. 왜 이리 카드가 많냐고 투덜거리니 옆에서 보던 남편이 카드를 없애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이건 어린이집 결제 카드고, 이건 대학원 학생증용 카드고, 이건 정수기 할부용 카드고, 이건 지역화폐 연동 카드고, 이건 주거래 은행 카드거든. 그나마 줄인 게 이 정도라니까?"


가계부를 쓸 때는 엑셀보다 계산기가 좋다. 뭔가 두드림의 맛이 있어서. 단, 무조건 한 번 이상은 실수하고 처음부터 다시 입력하는 것이 인지상정!


이것저것 계산을 하다 보니 의외로 회사에서 사 먹는 커피 값이 커서 놀랐다. 같이 커피 마시는 멤버들 중 내가 가장 선배라서 주로 돈을 내는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후배들한테 사주는 커피 값만큼은 아까워하지 말자가 모토였는데 어느새 모토는 잊은 지 오래다. 단지 몇 천 원에 부들거리는 쪼잔한 사람이 되어 있을 뿐이다. 누가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보라, 글을 보라 그랬는가. 손에 계산기 하나면 쥐어주면 될 것을.


다음으로 식재료, 생활용품 비용을 제하고 나면 외식비, 옷 값, 책 값들이 그 뒤를 잇는다. 이거, 커피 값이 문제가 아니었네. 깎을 곳이 없으니 내 용돈을 깎고 또 깎는다. 갑자기 울컥해진다. 이제는 합리화를 시작할 단계가 되었다. 이건 나를 위한 소비가 아니야. 나를 위한 투자지. 생활비를 조금 줄이고 내 용돈을 조금 올려본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조삼모사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소비인데….


어쨌든 이리저리 껴 맞추다 보니 수입=지출의 계획표가 만들어졌다. 허리띠를 확 졸라맨 것 같지만 사실 저축과 대출원금을 줄인 효과가 컸다.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어. 계획만 세웠을 뿐인데 이미 알뜰살뜰 살림을 꾸린 마냥 뿌듯하기 그지없다. 아마 얼마간은 계획과 실제의 괴리에 당황해하며 몇 번을 더 계산기를 두드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시행착오 끝에 숫자를 맞춰 나가는 과정이 삶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그래, 열심히 벌고 알차게 써 보도록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불평은 해결책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