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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Apr 21. 2021

두 권의 일기장을 쓰는 이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일기장은 두 권이다. 한 권은 A4 사이즈의 큰 노트이고, 하나는 손바닥만 한 조그만 크기다. 두 일기장은 크기뿐 아니라 쓰는 주기와 내용도 상이하다.


큰 일기장은 마음 내킬 때만 쓴다. 한 달에 한 번 쓸 때도 있고, 세 달에 한 번 쓸 때도 있다. 대신 쓰는 날이면 내용이 무척이나 길다. 우울한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일기를 다 쓰고 나면 팔이 얼얼할 정도다.


작은 일기장은 매일매일 쓴다.(.. 가 목표인데 자주 빼먹는다.) 분량은 한두 줄 정도 수준이다. 내용도 간단하다. 오늘 뭘 했다, 기분이 어땠다 정도를 간략하게 적는다.


누군가 나에게 왜 일기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일기를 쓰는 이유'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내 삶을 기록할 수 있고, 추억할 수 있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글을 잘 쓸 수 있고 등등 많은 효용이 나온다.


나에게 작은 일기장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위에 제시된 장점과 공통분모가 있다. 이 일기장의 기록들은 5년 뒤 나에게 줄 선물이다. 그때의 나는 어땠는지를 미래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봐봐, 그때의 고민이 지금은 아무 일도 아니잖아.' 하면서. 지금도 한 달 전의 내가 궁금해서 기록을 뒤적여본다.


그런데 큰 일기장은 좀... 애매하다. 그렇게 몰입해서 썼건만, 다시 들여다보기가 싫다. 일기 속 나는 어리고, 거칠고, 옹졸하다. 이 일기의 내용은 추억하고 싶지도 않고, 감사한 마음도 없으며, 횡설수설이고, 글씨까지 엉망이다. 굳이 쓰는 이유를 들자면 '치유의 글쓰기'라는 명목인데, 뭔가를 남기기 위한 기록의 목적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던 중 '지적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신선한 생각을 발견했다. 우리는 흔히 기록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기록이 무언가를 잊기 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일기 쓰기를 통해 그날의 일을 잊고 활기찬 내일을 맞이하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잊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문자로 써두면 잊기 쉽다는 점을 잘 이용하도록 한다. 그러고 보면 일기의 효용은 기억하는 데 잊지 않고, 오히려 잊어서 머리를 정리하는 데 있다. 생각해 보면 렘수면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일기 쓰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단 써두면 마음 어딘가에서 '이제 안심해도 돼. 써뒀잖아!'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본인은 알지 못해도 쓰레기가 버려진다. 일기를 다 썼을 때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은 망각과 쓰레기 배출이 끝나 상쾌해진 기분의 표현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일기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도 납득이 간다. 일기를 써서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있다면 활기찬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매일 그래야 한다. 쉬어서는 안 된다. 렘수면에 지면 안 된다. 필요 없는 것을 잊기 위해 일기는 존재한다. (지적 생활 습관, 도야마 시게히코)


아하! 드디어 큰 일기장을 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날의 괴로웠던 일을 버리기 위해서, 그날의 상실감과 우울함을 잊기 위해서 일기를 썼다. 그렇게 쏟아내는 과정은 집중과 쾌감이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배출된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는 게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큰 일기장의 시작일이 '2017.5.17'이다. 노트가 좀 두꺼워서 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이 일기장의 절반도 채우질 못했다. 나는 이 일기장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좋은 내용으로 채워주질 못해서,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해서. 그런데 잊기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잊고 싶었던 일들이 많지는 않았구나.


작은 일기장은 독자가 있다. 나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고작 몇 줄 적었을 뿐인데, 스스로가 기특하다. 반면, 마음이 너무나도 불안할 때, 억울함이 몰려올 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막막해질 때, 나는 큰 일기장을 떠올린다. 큰 일기장은 누구보다 나의 의견에 동조하고, 기꺼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준다.


그렇게 나는 두 권의 일기장을 쓰고 있다. 하나는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는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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