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와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좀 내성적이고 조용한 나와 달리, 그 친구는 붙임성도 좋고 말수도 정말 많았다. 나는 정확과 인정을 추구했고, 친구는 여유와 이해를 좋아했다. 헐렁한 교복과 꽉 맞는 교복, 하얀 피부와 까만 피부, 통통이와 날씬이. 우리는 성격도, 겉모습도 매우 달랐다.
그래도 우리에게 공통점을 찾자면 키가 좀 비슷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됐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 친구는 나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항상 신나서 이야기했다. 나에게 편지도 자주 써줬다. 그 친구에게는 정말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는데, 그래서 편지 아래에는 그 연예인 이름을 넣어 'OOO 부인'을 써놓았다. 그 연예인이 광고하는 교복 브랜드를 입어야 한다며 내 교복 상표를 보고는 나에게 눈을 흘기기도 했다.
어느 날은 학교에 눈이 퉁퉁 부어 왔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전날 밤에 인터넷으로 슬픈 글을 읽어서 그랬다고 했다. 나도 꼭 읽어봐야 된다며 종이에 사이트와 글 제목까지 써줬다. 나도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렇게 슬픈 글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그 친구는 감정이 풍부했다.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잔잔한 일에도 펑펑 울었다.
내가 약간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도 나보다 더 핏대를 세우며 어쩜 그럴 수 있냐고 열변을 토했다. '아니, 난 괜찮은데.' 그 친구를 말리느라 내가 처한 상황을 잠시 잊기도 했다. 막상 누군가 본인에게 뭐라고 할 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씩 웃고 말았다.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어른스럽기보다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친구는 열심히 내 마음의 문 초인종을 눌러댔다. 딩동 딩동. 그리고 내 마음의 문이 열리든 말든 문 앞에 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실 그 친구는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초인종도 누르고 다녔던 것 같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여기저기 다니느라 항상 분주하고 바빴다. 그런데 유독 내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살며시 문을 열고 그 친구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그래, 분명 엄청 친했는데. 우리가 함께 연락하고 지난 시간이 얼마인데. 그 친구와 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희미한 기억들을 더듬어보다가 선명해지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
그날은 우리 분단의 청소 날이었다. 그 친구는 나와 분단이 달라서 집에 간 상태였고, 반장이 청소 검사를 받으러 간 동안 교실에 앉아있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앉아서 떠들고 있었는데 한 무리에서 그 친구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뜸 나를 향해 물었다.
"너도 그렇지 않아? 어때?"
사실 그 친구에게는 약간의 신체적 결함이 있었다. (무슨 결함인지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겠다.) 다들 그 결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암묵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누군가 수면 위로 올린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네가 제일 친하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도 알고 있지?"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했던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인데 말 안 하고 있던 것뿐이잖아? 내가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이건 아무 일도 아냐.'
별일 아닌 일이 별일임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친구에게서 그 결함은 사라졌다. 어려서 다들 몰랐지만, 사실 간단한 수술로도 좋아질 수 있던 문제였다. 그 친구가 수술을 고백하던 날, 친구가 했던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 들었어. 애들이 다 그걸로 수군거리고 있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지? 근데 말이야. 있잖아. 혹시, 너도 내 흉봤어?"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등골이 서늘해지고 손에서는 땀이 났다. "그,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아, 안 했지. 갑자기 그건 왜?"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좀 속상하긴 한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건 신경 안 써. 근데 왠지 네가 먼저 그랬다고 했으면 정말... 정말... 슬펐을 것 같아서."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울음이 묻어나는 친구의 이야기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없이 여려 보이던 친구는 생각보다 강했다. 강했는데, 그게 나 덕분이라고 하니까 내가 울고 싶어 졌다. 나는 그때의 상황으로 나를 되돌렸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다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까?)
"당사자 없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와, 내가 이 멘트를 할 수 있었을까? 거의 염소 울음소리로 내뱉었겠네.)
아, 그냥 아무 말하지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야 했나.
지금도 어떤 대답이 가장 적절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나와 듣는 이를 고려한 대답이 아니라, 그 친구를 위한 대답을 했어야 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가급적 그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그 친구와는 이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다른 사건을 계기로, 각자의 삶을 살며 점차 멀어졌다. 그런데 잊으려고 했던 이 일은 지워지지 않는다. 깊은 상처의 흔적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짙어진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 있다. 나를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었던 친구에게, 나는 그 친구의 편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얼마 전 회사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내가 겪은 그 누군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물론 내 목소리는 단단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흔들렸다. 그래도 꿋꿋하게 나만의 이유를 덧붙였다. 다들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아마, 무안했겠지. 나중엔 뒤에서 나를 욕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민망하면 어때,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어때.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다들 뭐라고 해도 한 명만 아니라고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군가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정의는, 나의 배려는, 나의 수다는 다 그 친구로 인해 시작되었다. 오늘은 유난히 그 친구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