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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Jun 15. 2021

생각을 끓는 물에 익혔다가 찬물에 헹궈주세요

10여 년 전, 회사 근처에서 새벽 수영을 다닌 적이 있다. 6시 강습은 직장인들이 많았는데, 7시 강습은 그전 타임보다 평균 연령대가 높았다. 나는 7시 강습반으로 다녔다. 사실 그 시간도 이른 시간이었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7시 수업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6시 반에는 집에서 나와야 했다.


내가 지각을 안 한 날은 거의 없었다. 6시 반에 집에서 나와야 했는데, 6시 반에 일어나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씻겠다는 생각으로 출석은 했다. 늦게 들어가 맨 뒤에 서면, 같은 반 분들은 '젊은 사람이 체력도 좋은데 앞에 서야지' 하고 나를 앞쪽으로 밀어주셨다. 기실 체력은 그분들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오기 전 최소 자유형 10바퀴는 도셨을 텐데, 언제나 기운이 넘쳐 보였다.


수영을 마치고 벌게진 얼굴로 샤워실에 들어가면 그분들은 더 시뻘게진 얼굴로 사우나에 들어가셨다. 그 무리들 중에서 한 분의 패턴이 좀 달랐는데, 그분은 사우나에서 좀 일찍 나와 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샤워기로 향했다. 그리고 몹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내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그분의 격한 세수에 찬물이 다 튀었기 때문이다. 비누 칠을 하다가 그 찬물이 나에게 확 들이닥치면, 급하게 뜨거운 물을 틀어 냉기를 쫓아냈다.


찬물 폭격을 맞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탈의실에서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니, 기운도 좋아. 왜 이렇게 찬물로 세수를 해?" 세수를 하던 분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찬물로 세수를 해야 피부에 좋대. 뜨거운 곳에 있으면 모공이 넓어지는데, 그때 찬물 세수를 하면 모공이 줄어든다 하더라고."


나도 모르게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찬물 세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동년배들 중에서도 피부가 좋으셨다. 정말일까? 그날 이후로 그분의 말이 생각나 집에 돌아오면 찬물 세수를 했다. 차마 그분처럼 맨몸으로 냉수를 견딜 자신은 없었기에. 하지만 나중에 찾아본 결과 찬물도, 뜨거운 물도 아닌 미온수로 세수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


종종 북받치는 감정 속에서 헤엄치다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돌아서야 할 때가 있다. 아침엔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한 소설을 읽고, 회사에 출근해서는 숫자로 가득한 보고서를 읽을 때. 아동 폭력 기사를 보고 안타깝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서로 네가 밀었네, 네가 때렸네, 하고 싸우며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달려올 때. 친하고 다정한 동료지만 업무적으로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할 때.


마치 사우나에 있다 찬물로 세수를 하는 것처럼, 내 머리와 마음도 뜨겁게 달궜다가 차갑게 헹궈내는 기분이다. 감정을 찬찬히 식히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생각의 온도를 확 내리면 내 뇌에 부담이 가는 거 아냐?' 그러면 곧 더 쓸데없는 생각이 따라온다. '찬물 세수로 피부가 좋아진다는 것처럼, 이 과정이 내 뇌도 탱탱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뇌를 꺼내서 볼 수 없으니 이게 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연구논문을 들이밀기 전까지 우겨봐도 될 것 같다. '이렇게 하면 뇌의 탄력이 생긴대요.' 믿어 줄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나와의 타협은 가능해졌다. 오늘도 요상한 믿음을 바탕으로 내 머리와 마음을 뜨겁게, 차갑게 담금질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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