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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Jul 14. 2021

행복하게 사는(buy) 법

“혹시 이런 디자인으로 단색 원피스는 없나요?”

“어머, 고객님. 요즘엔 이런 꽃무늬가 유행이에요.”


옷걸이에 걸려있는 원피스들을 둘러보니 너도나도 꽃들이 잔뜩 피어있다. 나는 단순하고 무난한 옷을 사고 싶었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꽃무늬 중에서도 잔잔하고 화려하지 않은 꽃들이 피어있는 원피스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맨 앞줄에 걸려있는 원피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직원이 그 원피스를 보더니 이야기한다. '그게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거예요.' 


나는 옷 쇼핑을 좋아하지 않지만, 옷 하나를 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백화점도 갔다가, 아웃렛도 들렸다가, 역 근처 옷 가게들도 배회했다가, 온라인 쇼핑몰들도 수없이 드나든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옷은 너무 튀어서, 어떤 옷은 내구성이 떨어져서, 어떤 옷은 비싸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 또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과정이 너무나도 지루하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옷을 안 살 수도 없는 게, 계절이 바뀌면 옷장엔 입을 옷이 없다. 스티브 잡스처럼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만 입고 다니지도 못할 것 같다. 나는 내 옷에 대해서 자신감이 부족하다.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입고 나갔는데, ‘크크, 그 옷 뭐야’ 하고 웃던 친구의 모습이 이따금 떠오른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옷을 챙겨 입고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 나에게 ‘괜찮아?’ 대신 ‘괜찮아 보일까?’를 질문한다. 자꾸 타인의 눈이, 타인의 평가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책 구매에서는 이야기가 확 달라진다. 옷과는 달리 나는 책 쇼핑을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매우, 정말, 너무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때도 있다. 책을 구매하는 곳은 어디든 상관없다. 온라인 서점은 무거운 책들을 편하게 받아볼 수 있어서, 오프라인 서점은 책을 구경하면서 살 수 있어서, 중고서점은 저렴하게 여러 권의 책을 살 수 있어서 좋다.


서점에 들어서면 잠시 베스트셀러 코너에 눈길을 준다. 제목과 내용을 쓱 훑어보지만, 구매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보는 책일수록, 나는 더 멀리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베스트셀러 알레르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 책들은 큰 기대를 하고 봤더니 감동이 덜한 경우가 더러 있고, 다들 극찬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별로라고 선뜻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제목은 눈여겨본다. 그 책들이 진열장에서 내려올 때, 우리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니까.


책에 있어서 나의 취향은 대중없다. 처연한 분위기의 소설이 끌렸다가, 통통 튀는 수필이 좋았다가, 전문적인 과학서에 심취할 때도 있다. 날카로운 문체에 감탄하다가,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글에 빠져들기도 한다. 책은 나에게 음식과도 같다. 유난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것처럼, 그날따라 유난히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은 것처럼,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아직 출시되지 않은 맛있는 신메뉴가, 출간되지 않은 맛깔난 책이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살 때 마음이 가장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은 코너에 다다른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제목,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을 아무거나 집어 든다. 그리고 큰 기대 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본다. 순간 주춤한다. ‘어? 글이 너무 좋은데?’ 부리나케 다른 페이지를 뒤적인다. 세상에, 더 좋다. 온몸이 기쁨으로 들썩인다. 책을 바로 덮는다. 이 책은 사야 한다. 사서 아껴가며 읽어야 한다. 남몰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이렇게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책 쇼핑은 몇 시간을 해도 질리지 않는다. 책은 내용이 중요하다지만, 나는 책의 외관도 알뜰살뜰 살핀다. 책의 표지, 책의 크기, 책의 잡는 느낌, 책의 글씨체, 책의 냄새까지. 그래서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제목이 조그마하게 적힌 잔잔한 빛깔의 표지를 입고,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크기의 가벼운 책이 좋다. 뭔가 꾹꾹 눌러쓴 듯한 글씨체로 쓰여있고, 옅은 향긋함이 묻어나는 책이 마음에 든다. 책에 흠이 있나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라도 내 마음에 드는 곳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계산대에 가기 전까지 어떤 책을 빼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고생하기 일쑤다.


심사숙고해서 골라온 책은 집에 오면 방치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 책이 눈에 들어온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씹어가며 책을 읽기도 하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허겁지겁 읽어 내려가기도 한다. 간혹 재밌게 느껴져서 골랐는데 지루해서 진도가 안 나가는 책도 있다. 그럴 땐 그 책을 덮고 책꽂이에 꽂아둔다. 나중에 다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를 기대하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으려면 빌려 읽는 것보다 사서 읽는 것이 편하다. 책과 나의 만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물건보다도 옷 쇼핑과 책 쇼핑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그 둘을 향한 내 마음은 사뭇 다르다. 옷 쇼핑은 어렵고 부담스럽지만, 책 쇼핑은 편하고 즐겁다. 이유가 뭘까? 아마 옷을 고르는 기준과 책을 고르는 기준의 중심축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옷의 선택은 타인의 평가에, 책의 선택은 나의 평가에 기인한다.     

옷에 있어서 나는 튀고 싶지 않다. 남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무난한 옷이 내 취향이다. 내 옷장을 열어보면 흰색, 검정, 남색의 옷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원색의, 유행을 선도하는 옷을 열심히 입고 다닐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내 옷을 평가받는 것이 불편했다. 잘 입는다는 칭찬은 부담으로 다가왔고, 옷이 왜 그러냐는 핀잔은 나를 검열하게 했다. 어쩌면 무난한 옷이 나의 취향이라기보다, 내 옷에 대한 무난한 평가가 내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책을 고를 땐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내 마음에 드는 책인지가 중요하다. 어릴 적 주말마다 아빠와 서점에 다니곤 했다. 아빠는 본인의 책을 둘러보며, 나에게도 사고 싶은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셨다. 분야도, 내용도 전혀 제약이 없었지만 대신 딱 한 권만. 내가 선택한 책은 만화책일 때도, 수수께끼 책일 때도, 괴담 모음집일 때도, 동화책일 때도 있었다. 그 책을 소중히 끌어안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로부터 ‘왜 그런 책을 샀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수십 권 중에 고르고 고른 소중한 책이라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고른 책은 분야가 일관적이지 않고 타인의 선호와는 거리가 멀 때도 있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일은 항상 나에게 설레는 일이 됐다.


나에게 있어 효율적이고 즐거운 쇼핑 코스를 하나 소개한다. 우선 예산을 잡는다. 이 돈은 무조건 그날 다 써버릴 돈이다. 쇼핑은 혼자 하되, 3시간 안에는 돌아오겠노라고 가족들에게 약속한다. 일단 옷 가게로 향한다. 좋아하지 않는 일부터 먼저 하면 마음이 편하니까. 서둘러 필요한 옷을 고른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다음 코스의 시간이 줄어드니, 마음이 급해진다. 옷이 담긴 쇼핑 봉투를 건네받자마자, 다음 목적지인 서점으로 달려간다.


서점에서 원하는 책들을 사고 나면 예산에서 만 원 정도의 돈이 남을 때가 있다. 원하는 책 한 권을 사기엔 조금 빠듯하다. 그럴 땐 서점 근처의 중고서점으로 향한다. 이 돈이면 중고책 두 권 정도를 더 살 수 있다. 그리고도 몇천 원이 더 남는다면? 근처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산다. 커피 한 잔 쪽쪽 마시며, 쇼핑한 옷과 책을 끌어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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