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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Sep 09. 2021

우리 사이의 적정온도

그날의 나는 우울했다. 회사에는 잔뜩 일이 쌓여 있었고, 단짝 친구와는 냉전 상태였으며, 주말에 본가에 갔다가 엄마와 크게 싸웠다. 자취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삼켰다. 평소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그날따라 감정이 잘 통제되지 않았다. 그날은 나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집에 가방을 던져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잘 시간이 되었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집 근처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나는 종종 운동 삼아 그 길을 걷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산책로 중간에 놓여있는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습하고 더운 밤이었지만, 가만히 있으니 엷은 바람이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음료수 캔 하나를 내밀었다. 화들짝 놀라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니 회사 선배다. 오며 가며 인사만 하고 이름만 아는 그런 데면데면한 사이. ‘그냥 대리님 드세요’ 하려는데 그의 손에는 2개의 음료수가 들려있었다. 뭐지, 싶었지만 일단 음료수를 받았다. 더워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빨갰다. 반면 건네받는 캔에서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선배는 나처럼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그 산책로에서 우연히 몇 번을 마주했다. 그렇게 반복된 우연은 우리를 인연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그가 고백하기를, 그 길에서 나를 마주친 게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몇 번이나 나를 보고 말을 걸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빠르고 씩씩하게 걸어가더란다. 그렇지, 나는 대부분 신나는 음악과 함께 열심히 파워워킹을 하고 다녔으니. 오랫동안 앉아있던 그날의 나를 보고 그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근처 슈퍼로 달려가 급히 음료수를 샀다. 그동안 내가 자리를 뜰까 봐 초조해하면서.


그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와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같은 회사라는 것도, 그의 집에서 결혼 압박이 있다는 상황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 나에게 그는 덤덤하게 물어왔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요?” 마치 시식 코너에서 ‘안 먹어도 되니 한 번 잡숴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일단 한 번 만나보지 뭐.


가벼운 시작과 달리 우리의 관계는 결혼까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처음엔 양가 부모님이 밥이나 한번 먹자 하셨고, 다음엔 지인들 결혼식에 함께 참석하니, 어느새 ‘너희는 언제 결혼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제야 그를 찬찬히 뜯어봤다. 우리가 결혼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은 즐거웠고, 각자 서로의 다른 점을 좋아했다. 성격이 급했던 나는 그의 여유로움을, 할 일을 미루던 그는 나의 부지런함을 예뻐했다.


그전까지 나는 나와 결혼할 사람은 매우 특별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 운명의 상대는 내 가슴을 절절하게 끓게 만들고, 같이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며, 내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놓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는 내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와 있으면 편안했고, 그 앞에서는 콧물을 질질 흘리고 방귀를 뿡뿡 뀌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변화시키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에게 물었다.

“결혼하면 뭐가 좋은 걸까요?”

그가 대답했다.

“내 편이 생긴다는 거? 그게 가장 좋은 점이 아닐까.”

나는 그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


그와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십여 년간을 함께 살면서 우리는 변해갔다. 이제는 남편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남편을 발견한다. 나는 몇 끼의 설거지를 쌓아놓고도 모른척하며, 남편은 늦어지는 배달음식을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한다. ‘밥 먹자마자 눕지 마!’라는 외침은 내 입에서 그의 입으로, ‘곧 오겠지. 기다려봐’라는 대답은 그의 입에서 내 입으로 옮겨갔다. 상대방을 나무라면서도, 서로 그럴 자격이 있나 싶다.


또한, 이제 그의 문제는 나의 문제기도 하다. 나와 남편은 ‘우리’로 묶이고, 종종 ‘우리’는 ‘나’와 진배없이 사용된다. 내 집, 내 가족, 내 월급.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월급. 네가 내가 되어버리니, 나는 저절로 내 편이자 네 편이 되어버렸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우리 사이의 온도가 아닐까. 우리의 온도는 고온과 저온 사이에 있다. 물론 결혼 후 치열하기 싸우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냉랭하게 말한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뜨겁게 가열해도, 차갑게 냉각해도 곧 원래의 온도로 되돌아왔다. 힘들 때 무너지지 않을 온기와, 분노를 식힐 수 있는 냉기와, 행복함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온도로.


남편과는 함께 있어도 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이야기를 나눌 기운도, 시간도 부족하다. 그래도 주말 아침이면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식탁에 마주 보며 앉는다. 별 시답잖은 농담으로 시작해서 최근 관심 사항과 고민 등을 나누다 보면 기분이 새롭다. 이제는 남편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몰랐던 부분이 튀어나온다. 엉뚱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드물지만 간혹 사랑스럽기도 하다.

 

문득 작년에 집에 들인 정수기가 눈에 들어온다. 정수뿐 아니라 냉온수도 되어 잘 쓰고 있다. 아쉬운 점은 최고 온도가 100℃가 아니라 85℃라는 사실이다. 전자 매장에서는 85℃이어도 커피 믹스를 녹여 마시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마치 나와 남편 사이의 온도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온도는 팔팔 끓고 절절하지는 않지만, 결혼을 유지하고 사랑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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