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라 웰티의 소설 작법>(엑스북스, 2018)
소설가 유도라 웰티의 <유도라 웰티의 소설 작법>(엑스북스, 2018)은 작가처럼 읽고 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수십 년간 작가로 활동한 문학예술 분야에 대한 견해를 담아냈다. 웰티는 소설 형식이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설명하기 위해 버지니아 울프, D.H.로렌스, 안톤 체호프의 세계관을 예로 든다. 단편 소설 대가로 평가받는 웰티의 단편소설 쓰기뿐 아니라 소설가와 비평가의 의무, 소설에서의 장소 활용법, 소설 분석 등을 다루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 이후 대표적인 미국 남부 작가로 평가받는 유도라 웰티는 고향에서 전원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상과 유머스러운 스타일을 보여주며 작품을 써냈다. 처음 웰티는 광고홍보 커리를 꿈꿨으나, 1930년 중반부터 정기적으로 소설을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을 택했다. 1941년 단편소설집 <초록빛 커튼>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작품을 펴내다 휴식기를 가진 그녀는 장편 소설 <패전>(1970)을 발표하고 <낙천주의자의 딸>(1972)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회고로 <작가의 시작>(1984)은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유도라 웰티의 플롯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직선적인 플롯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로운 변형을 보여주는 플롯이다. 두 가지의 ‘상황’, ‘이야기’, ‘등장인물’, ‘심정과 감정’ 등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웰티의 견해다. 그녀는 “소설을 포함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탐구의 여정이라는 플롯을 다룬다.”(p.26)라며 “플롯이 진행되는 모습에서 그 플롯의 감정과 감정의 강약이 진행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플롯은 가장 유용한 플롯이다.”(p.38)라고 강조한다. 작가 웰티는 그런 입장에 대해 헤밍웨이와 D.H. 로렌스를 예로 든다. 여기서의 핵심은 ‘분위기’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로렌스의 소설 분위기는 순수하지만 농밀한 감각으로 만들며 작품 안에서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는 수식어구와 군더더기 단어가 적은 헤밍웨이의 경우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라며 “오직 노련한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이러한 대화기법은 작가의 의도를 감추는 동시에 겉으로 드러내 보이며, 독자들로 하여금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막혀 있음을 깨닫도록 한다.”(p.30)라고 말한다. 그녀는 단편소설을 이해하려면 독자와 작가의 관점을 함께 고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며 “플롯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이며, 그 작은 세계가 우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p.26)이라고 답하고 있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유도라 웰티가 말하는 ‘소설의 장소’이다. 우선 소설이란. 웰티는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의 지역성, ”현실성“, 현재성, 일상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p.80)라고 정의 내린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든, 작가는 이야기의 장소를 보여줌으로 그걸 믿을 수 있도록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끄는 존재다. 소설 속 장소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면의 생각은 진실이지만 외형은 언제나 허구라는 게 그녀의 관점이다. 소설의 장소란, “소설의 감정 세계를 표현하는 사실 같은 공간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 현실성”(p.89)을 유지하는 곳이다. 웰티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페인을 모티브로 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독일 남서부를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 W.H. 허드슨의 <녹색의 장원>을 예로 든다. 그녀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주어졌을 때부터 장소에는 정신이 깃들게 되었고, 인간이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장소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했다.”(p.91)라고 설명한다. 장소에서 이끌어 낸 감정을 예술로서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천재성이라는 말하는 유도라 웰티의 입장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다. 그녀는 항상 프레임 안에서 두 개의 이미지, ‘자기 관점’과 ‘세상의 관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가는 단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독자라면 4부 ‘소설 언어’를 먼저 읽어보면 어떨까. 바로 지적 호기심으로 안내하는 ‘책과 글쓰기의 세계’다. 소설가 유도라 웰티는 “독서와 글쓰기는 특정 방식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상상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상상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는(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다.”(p.114)라고 이야기한다. 웰티가 생각하는 독서와 글쓰기란, 전자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깨닫게 되고, 그런 지점에 도달했을 때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이해’이며, 후자는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글쓰기는 규칙이 아니다. 살면서 각자 터득해야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글쓰기를 학습하는 방식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라는 게 웰티의 견해다. 그녀는 글쓰기 학습은 독서학습의 일부분으로 바라본다. “글쓰기나 독서에서 생겨난 것이든 아니든,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 사회는 소설을 읽지도 않을 공산이 크다.”(p.115)라는 읽기에 관한 우려감 역시 빼놓지 않는다.
소설을 쓰고 싶거나 문학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길 원하는 독자라면 소설가 유도라 웰티의 비평적 견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건 ‘웰티의 소설 깊게 읽기’다. 웰티는 작가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상상력의 발동’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의 인식’이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감수성은 현실의 삶에서 모방될 수 없지만 소설에서는 함께 할 수 있는 속성이다.”(p.59)라며 “감수성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아름다움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이해할 수 있다.”(p.59)라고 말한다. 저자 웰티는‘D.H.로렌스’, ‘안톤 체호프’, ‘버지니아 울프’의 세계관을 언급하며, 아름다움과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체호프와 로렌스의 다른 면을 비교한다. 그녀의 입장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삶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 것이 체호프이며, 소설을 통해 세상에 맞서 저항하는 한편,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사하는 게 로렌스다. 버지니아 울프를 바라본 유도라 웰티의 시선은 ‘지적 감각’이다. 울프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성에 대한 감각은 비판적이었다라는 게 웰티의 생각이다. 그녀는 “독자들이 울프의 글쓰기를 아름답고 혁신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녀의 글 속에 표현된 삶이 그녀에게 감각의 문제인 동시에 지성의 문제였기 때문이다.”(p.45)라고 답한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삶과 감정’, ‘삶과 저항’, ‘지적 감각’으로 설명한 유도라 웰티의 비평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비평가의 신뢰성과 진실성’>
내가 언급한 비평가가 포크너의 소설을 읽고 미국 남부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해도 나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비평가에게 하고픈 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작가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는 모든 증거는 그 작가의 현존 여부를 떠나 그 작가의 작품 내용 안에 있다. 원고를 제본한다고 해서 원고의 신뢰성이 달라지지 않듯, 작가가 특정 인종이라고 해서 작품의 신뢰성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작품의 진실성은 사라질 수도, 감출 수도, 거짓으로 꾸밀 수도, 소멸할 수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수명을 늘릴 수도, 끝까지 부정할 수도 없는 존재다. 오늘의 진실성은 어제의 진실성과 동일하고 내일의 진실성과도 동일하다. 진실성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소설가와 비평가의 활동 영역은 각각 소설과 신문 사설이다.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소설가와 비평가의 의견은 모두 타당하다. 나는 소설가와 비평가는 서로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이 옳고, 다른 한편이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직함이 아니다. 사람들은 정직함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적절한 목적을 위해 적절한 언어로 이야기를 하느냐이다.
소설은 인쇄된 활자를 통해 독자의 눈에 보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소설을 신문 기사나 연설과 흔히 혼동하곤 한다. 이들은 소설을 오해해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자체에서 소설가의 목적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가는 실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대신, 그 현실을 자신이 쓸 소설의 원재료로 삼는다. 소설가의 목표는 소설의 이야기 속에 현실을 담아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당연히 소설의 본질은 원재료와 다르다. 아니, 소설은 원재료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다. 소설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소설에는 그 글을 쓴 소설가 단 한 사람의 생각만 담겨 있다. 무엇보다 소설과 소설의 원재료가 차별화될 수 있는 까닭은 소설은 내재적인 특성상 작가와 독자가 상상력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인데, 이는 소설과 저널리즘이 차별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p.137-139)
<‘자신의 소재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시도하기’>
소설가의 이야기는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구조가 논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내면에서 창조되어 각자 고유한 삶이 주어진 존재이듯, 플롯 역시 생생한 원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고유한 모양을 형성해 나간다. 소설의 플롯을 만드는 것은 의견을 주장하는 것보다 천배는 더 복잡하며, 주장에는 정답이 있을 수 있지만 플롯에는 정답이 없다.
물론 플롯은 일정한 패턴이 아니다. 플롯은 내면의 감정이 겉으로 연출된 결과다. 플롯은 비록 제멋대로일지언정 인위적이지 않다. 매우 비현실적인 플롯이라면 이를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플롯과 플롯의 소재에는 언제나 유기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비현실적인 플롯은 결국 환상이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소설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소설가는 증거가 아닌 본질을 추구한다——―을 얻기 위해 주변 세상을 다양하게 다뤄본다. 실제로 소설가는 자신의 소재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한다. 어떤 모양을 만들어 보고, 끊어질 때까지 잡아당겨 보고, 두 배로 늘려 보고, 거꾸로 사용하기도 한다.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에서 알 수 있듯, 어떤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소설가는 그 무엇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도 소재를 조작하지는 않는다. 소설가는 소재를 그 자체로 무한히 존중한다. 이는 소설가가 소재에서 통찰력을 얻고, 그 통찰력을 통해 어떤 소설을 쓸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소설가들은 비록 완벽한 소설을 쓰지는 못하지만 대신 매번 소설을 통해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목적이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여러 편의 소설을 쓸 필요가 없다. 무엇하러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번 증명한단 말인가?
올바른 신념을 지닌 소설가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소설을, 아니 전부 똑같은 소설을 써내고 말 것이다. 그러면 기존 작가들은 작가 활동을 이어 나갈 이유가, 신진 작가들은 작가 활동을 시작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왜 철의 장막 뒤에서 소설을 쓰지 않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추측건대 그 사회에서 용인되려면 모든 소설이 하나에 순응하고 획일화되어 결국 소설이 그 가치를 잃어버려서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비전이 누군가의 지시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작가와 독자는 일상의 씨실과 날실이 우리 개성대로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타고난 재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남들과 똑같이 삶을 이해하고, 그것에 그럭저럭 만족할 것이다. 위대한 소설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를 그리워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소설에서 다룰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는 그 삶이 살아 볼 가치가 없음을 보여 주는 첫 번째 징조라고 생각한다.(p.145-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