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로 가는 징검다리 하이든’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by readNwritwo

“하이든의 음악적 생애는 크게 보자면 둘로 나뉜다.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종복이었던 하이든이 주군의 마음에 쏙 드는 곡을 쓰려고 노력했던 반면에, 자유로운 신분의 하이든은 불특정 다수의 청중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새로운 운명과 마주친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년 3월 31일~1809년 5월 31일)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다산의 음악가였다. 그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막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100곡이 넘는 *교향곡(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 18세기 후반에 형식이 갖추어지고, 고전파 이후 중요한 곡종(曲種)이 된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과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바이올린 2, 비올라 1, 첼로 1), 34곡의 오페라와 4곡의 오라토리오(1718세기에 가장 성행했던 대규모의 종교적 극음악.)……. 그밖에도 많다.

*타악기 : 손으로 직접 두드리거나, 채, 말렛 등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군.
*관악기 : 금속·나무·대 등의 관을 입으로 불어서 관 속의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악기.
*현악기 : 현을 발음체로 하여 음을 내는 악기.

(중략)

하이든은 그렇게 수많은 곡을 썼다. 게다가 그토록 방대한 분량 속에서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는 남다른 능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변의 음악 애호가들 가운데 “하이든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또 그의 음악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고전주의’의 성을 같이 쌓았던 후대들, 이를테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뜸하게 연주된다.

(중략)

세상을 떠난지 200년이 넘은 하이든은 그렇게, 고전주의 이후의 음악사에서 누구도 뛰어넘기 힘든 ‘양’과 ‘질’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고전주의 소나타와 교향곡의 형식을 완성했다는 측면에서뿐 아니라, 개인적 삶의 궤적에서도 ‘근대로의 이행’을 고스란히 보여줬던 작곡가였다.

마차 바퀴를 만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교회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하다 변성기에 이르자 버림받았으며,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30년을 봉직했다. 가난과 제도를 묵묵히 견디며 음악의 길을 걸었던 그는 1790년대에야 에스테르하지 가문과의 계약을 끝내고 ‘직업 음악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물론 그 ‘독립’이 하이든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궁정에서 독립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음악가가 마침내 음악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사실 하이든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졌던 필연이었다.

일단 30년간 그의 주군이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가문의 계승자였던 후작의 아들 파울 안톤은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하이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력이 출중한 악단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의 귀족들에게 사회적 신분과 교양의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파울 안톤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이든의 족쇄를 풀어줬다는 식의 풀이는 온전한 타당성을 갖기 어렵다는 얘기다.

(중략)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갖고 있던 토지를 시민계급에게 돈을 받고 넘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심지어 돈 많은 시민계급과 결혼해 호화생활을 유지하려는 경우까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자본을 갖고 있는지가 계급의 새로운 척도로 떠오르면서, 수백 년간 지속돼온 귀족과 서민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유한 시민계층은 런던과 파리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음악협회를 만들었으며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물질적 후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귀족이 독점해온 음악의 새로운 주인으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한때 유럽에서 최대의 영지를 소유했던 에스테르하지 집안도 시대의 거센 흐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하이든이 30년이나 묶여 있었던 ‘음악 하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덕택이었다.


하이든의 음악적 생애는 크게 둘로 나뉜다. 물론 다소 거친 단정일 수도 있지만, 전반기의 하이든이 ‘을’의 신분이었다면 후반기의 그는 ‘갑’의 신분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곡을 쓰는 이유와 명분도 바뀌었을 것이다.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종복이었던 하이든이 주군의 마음에 쏙 드는 곡을 쓰려고 노력했던 반면에, 자유로운 신분의 하이든은 불특정 다수의 청중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새로운 운명과 마주친다. 말하자면 흥행과 인기를 의식하게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음악의 스타일과 분위기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종복으로 일하던 시절에 이미 90곡이 넘는 교향곡과 현악4중주(바이올린 2, 비올라 1, 첼로 1) 60여곡, 그밖에도 현악과 피아노3중주(피아노 1, 바이올린 1, 첼로 1)를 비롯한 많은 곡들을 썼다. 그러나 귀족사회의 여흥적 요소를 다분히 가진 당시의 곡들은 후반기의 걸출한 작품들에 비해 오늘날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초기의 작품 가운데 지금도 애청되는 곡으로는 뭐가 있을까? 일단 두 곡의 첼로협주곡이 떠오른다. 교향곡 중에서도 45번 <고별>이 대표적일 것이다. (중략) 하이든이라는 음악가의 존재를 오늘까지도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는 곡들은 역시 후반부의 명곡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에스테르하지 시절의 끝 무렵에 썼던 <종달새>를 필두로 <황제>, <일출> 등의 걸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악4중주곡들, 파리와 런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했던 후기의 교향곡들, 이 글의 앞자락에서 언급했던 <트럼펫 협주곡>, 그리고 하이든의 말년작이었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 등이 모두 생애의 후반부에 쓰인 걸작들이었다.

그렇게 하이든 개인의 삶에서도, 또 음악사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의 서막과 같았던 1790년. (중략) 그는 이미 유럽 음악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오스트리아 전역에 음아가로서 명성을 떨쳤고 1890년대에 이르게 되면 유럽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음악 애호가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60세를 바라보던 하이든은 어느덧 음악가로서 다다르기 어려울 정도의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파리와 런던에서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콘서트홀에 모인 다수의 청중을 위해 곡을 쓰기 시작했다. 가난한 하층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종복으로 30년을 살았던 하이든은 마침내 유럽 최고의 흥행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그는 그렇게, ‘근대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고 1809년 5월 31일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였다. 오스트라이아 빈을 공격하던 나폴레옹 군대의 포성이 들려오던 때였다.(p.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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