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소설적 행위는 타산적인 행위들을 뚫고 나와 작렬한다. 그것은 쾌락원칙의 기율 안에 엎드려 있는 우리를 가격하면서 ‘쾌락원칙의 피안’을 넘나드는 실존의 심연을 열어젖힌다. 여기, 이오카스테가 울부짖는다. “오오 불행하신 분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오이디푸스 왕> 1068행)
이 절규는 모든 ‘소설적인 것’들이 작렬하기 직전에 깔리는 무시무시한 전조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선택하고 끝내 파멸을 향해 간다. 때로 인간은 이렇게 진실이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제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제 눈을 찔렀다. 그로써 ‘자기 자신’이기를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주체화’의 본래 뜻이다.
이것은 고대의 사례지만 뛰어난 근대소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뛰어난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 눈을 찌르면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이 ‘낭만적 아이러니’(헝가리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로 이어지건 ‘수직적 초월’(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로 이어지건, 그보다 먼저 세계에 맞서 기꺼이 몰락하기를 선택하는 인물 없이는 ‘소설적인 것’이 발생할 수 없다. 이런 전대미문의 행위도 가능하다,라고 ‘소설적인 것’은 말한다.(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