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21.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21. 낭만적 공간을 표류할 때

by 밍구


“엄마, 한국이 서울인 거야?”

국기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해 국가와 수도 메모리 게임을 사서 첫 판을 할 때였다.

“한국은 나라 이름이고, 서울은 수도야. 수도가 뭐냐면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도시야.”

나는 서울과 모스크바의 공통점을 떠올리며 말한다.

“그럼 우리가 한국에 가면 서울인 거야?”

시우는 마치 내 머릿속을 엿보기라도 한 듯 바로 자신이 겪었던 한국의 도시를 떠올리며 묻는다.

“아니, 시우는 아직 서울에 가본 적 없어. 대신 다음에 한국 가게 되면 서울 구경 가자. 이순신 장군 동상도 보고, 경복궁 구경도 하고, 남산 타워도 올라가 보자.”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아들과의 서울구경을 그려본다.


작지만 다채로운 서울이 내 삶에 들어왔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헤아려보니 고작 칠 년 남짓이었다. 나의 서울은 주로 혜화동과 삼청동, 종로 일대와 충무로, 그리고 상수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스물, 그 설레는 숫자를 가졌을 때 나는 마로니에 공원을 많이 사랑했다. 나는 늘 혜화역 4번 출구와 1번 출구에서 걸음을 빨리하거나 비틀거렸다. 상행선 열차를 탄 아침의 나는 늘 지각할까 허둥지둥거렸고, 하행선 열차를 탄 늦은 밤의 나는 서울역에서 1호선 막차를 놓칠세라 전전긍긍하였다.

캠퍼스 안 크고 작은 건물의 이름과 강의실, 도서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역의 서재와 자리를 눈에 익히는 것처럼 나는 캠퍼스 밖 대학로의 단골 술집을 찾는데도 전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작업은 응당 길라잡이가 많이 필요했다.


레몬 슬라이드 하나를 물고 먹는 테킬라를 사준 선배는 내 손등에 소금을 얹으며 내 손이 자신의 엄마 손을 닮았다고 하였다. 도자기로 만든 잔에 생맥주를 따라주는 조도가 어두운 호프에 데려간 선배는 못생긴 잔이 부딪칠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술맛을 돋운다 하였다. 간판 없는 누룽지 막걸리 집 이름이 민처라고 알려준 선배는 이곳에서 듣는 김광석과 김민기 노래가 가장 맛깔난다고 하였다. 당구대 같은 테이블의 가운데를 움푹하게 패여 얼음이 득시글한 그곳에는 세계 병맥주가 쏙쏙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기네스를 꺼내어 내 앞에 넌지시 올려놓던 선배는 엄지로 병뚜껑 자리를 닦아 건네는 매너를 알려 주었다.

누운 것인지 앉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소파 아닌 커다란 쿠션에 앉아 이름이 야할수록 맛있다며 ‘섹스 온 더 비치’를 시켜주던 선배의 눈빛이 음탕했던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수했던 나는 몽환적인 술집에서 독특한 칵테일 이름을 정독하며 열 잔을 마셨다. 사과 소주의 톡 쏘는 청량감에 연거푸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별나라에 간다는 걸 친한 동기는 변기를 부여잡고 몸소 알려줄 정도로 친절하고 풋풋했다. 빨간색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던 고학번 여선배는 조수석에 날 태우고 재즈의 볼륨을 높인 채 학교 후문에서 이어지는 북악 스카이웨이를 그루브를 타듯 맵시 있게 돌고 돌아 달렸다. 어느 기와집에서 와인을 사주며 낭만을 즐기는 여대생이 되라며 나를 취하게 한 그녀는 외국 여배우처럼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머금었다.

남녀 화장실의 천장이 막혀있지 않아 함께 소주를 진탕 마시다가 각자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누구의 오줌발이 더 센지 귀 기울이던 질펀한 추억도 줄줄 새는 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호객행위를 하는 어설픈 개그맨에게 못 이기는 척 붙잡혀 들어가 지하 소극장에서 그들의 실험적인 개그 코드를 이해하느라 난해한 시간을 뒤척이기도 하였다. 작은 소품 가게나 거리의 리어카에서 마음에 드는 핸드폰 고리를 고르고, 말도 못하게 깜찍한 강아지 옷의 엑스라지를 찾아냈고, 불량식품을 어린아이처럼 사 먹었다. 이따금 아직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스티커 사진 가게에 들어가 제법 무거운 천막을 열어젖혀 좁은 공간에서 옥닥복닥 어깨동무를 한 채 사진을 찍었다. 아주 가끔 동기들과 노래방에 가서 각자의 18번을 찾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노래방을 나설 때 사장님이 민망하게 우리의 고주망태가 녹음된 두 시간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건넸다.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만지는 나날이었다. 그게 응당 우리의 할 일이라 여겼던 날들. 학생증을 내밀어 아직 직장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귀여운 어린 날. 혼자여도 좋았고, 둘이어도 좋았고, 우르르 여도 좋았다. 금잔디에 새우깡과 생수 2L만 있어도 맛있었고,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안주가 놓여있어도 전혀 괘씸하지 않았다. 소주와 맥주, 누룽지막걸리와 와인, 칵테일 등 다양한 술이 술을 불렀다. 혜화에서 부천까지의 막차는 늘 10시 26분이었다. 아직 한창인 술자리에서 나만 쏙 빠져야 하는 게 아쉬웠던 나는 낮술마저 탐닉했다.

이름마저 낭만적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나의 모든 낭만이 표류하던 마로니에.


***

나경아, 엄마는 대학에서 좋은 선생님을 세 분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은 대학교 첫 수업이었던 문학 입문 교수님이었어. 엄밀히 말하면 강사였던 그분이 좋아서 나는 계절학기도 불사하고 그 선생님의 모든 수업을 따라다녔어. 그분이 우스갯소리로 내 이름이 당신의 첫사랑과 같다며 나는 무조건 A+이라 하였는데 정말 그분의 모든 수업은 A+을 장식했지. 지금도 강의 목차와 강의 공책, 발제문까지 모두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꽤 열정적인 학생이었어.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존경을 담아 선생님과 소통할 수 있는 위치의 대학생 신분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어. 고등학생 때까지는 선생님만 어른 같고, 제자는 마냥 그들을 따라야 하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기 일쑤였거든.

새내기 시절은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에서 하나씩 허물을 벗는 느낌의 나날이었어. 그걸 달리 표현하면 청춘의 낭만이라 정의할 수 있겠지. 너의 낭만적 공간은 어디가 될까. 나는 운이 좋게도 나의 낭만이 표류하던 공간을 부른 노래가 있단다. 너도 너의 공간이 생기면 그 공간을 배경으로 삼거나 표제로 내건 각종 문학작품을 탐미하길 바란다. 그건 더욱 너의 낭만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테니 말이야.


Track 21.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작사·작곡 김선민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이십일 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주며

아침 햇살 눈부심에 나를 깨워줄

그런 연인이 내게 있으면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봤으면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이십일 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주며

아침 햇살 눈부심에 나를 깨워줄

그럴 연인이 내게 있으면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봤으면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창밖에는 우울한 비가 내리고 있어

내 마음도 그 비 따라 우울해지네

누가 내게 눈부신 사랑을 가져줄까

이 세상은 나로 인해 아름다운데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