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23.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

23. 네가 마련한 돈으로 소망한 물건을 살 때

by 밍구


“엄마, 나 이거 사줘. 우리 집에 이거 없잖아.”

관광지에 가면 기념품 가게부터 찾는 아들은 뒷짐을 지고 진열대의 물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드디어 찾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이거? 너무 비싼데. 원래부터 갖고 싶어했던 물건도 아니잖아. 네가 정말 사고 싶으면 칭찬스티커 다 모아서 사. 그냥은 못 사줘.”

나는 진열대 속 터무니없는 가격표를 보고 도리질 치며 단호하게 얘기했다.

“알았어, 엄마. 내가 칭찬스티커 모으면 여기 있는 거 다 살 거야.”

시우는 쉽게 수긍하며 장난감을 내려놓았지만, 저기 목 놓아 울며 드러누운 오나경이 문제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합주부를 모집하였다. 나는 리듬악기세트에서 심벌즈를 꺼내 호기롭게 합주부 오디션을 치르는 과학실로 향했다.

“너 피아노 칠 줄 아니?”

담당 교사는 제 손바닥만 한 심벌즈를 들고 서 있는 체격 좋은 내게 새빨간 아코디언을 내밀었고,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 악기가 쏙 마음에 들었다. 공연 연습을 길게 할 때면 어깨가 욱신거리고 이제 막 봉긋해지는 가슴 몽우리가 아팠다. 그러나 내 품 안에서 소리를 내는 아코디언이 좋았다.

대학생 1학년이 된 나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비장의 무기를 들고 학생회관 1층에 자리한 오케스트라 동아리방 문을 두드렸다.

“너도 플루트야? 어제 온 신입생도 플루트였는데 넌 얼마나 배웠니?”

수준급으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동기가 나보다 한 발 앞서서 가입한 상황이었다. 설령 그녀가 나보다 두 발 늦게 왔다 하여도 관악기 파트는 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실력이 좋은 그녀에게 나는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현악기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그리고 콘트라베이스 등 필요한 음역이 많았다. 현악기는 연주해본 적 없는 나는 독주곡은 많지 않으나 합주에는 꼭 필요하며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색을 모두 겸비한 비올라를 택했다. 마침 주인 없는 동방(동아리방의 준말) 악기로 비올라가 있었고, 나는 비올라 파트 선배와 공강 시간을 맞추어 그에게 비올라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 자세가 엉망인지 목과 어깨가 아팠고, 비올라의 매력에 깊게 빠지지 못한 신입생의 삼월이었다.

신입생 환영회를 치르고 각자의 악기가 어느 정도 정해지자 선배들은 600주년 기념관 앞에서 새내기들 소연주회를 준비하게 했다. 나는 플루트와 두 대의 바이올린으로 사인 일조를 이뤄 연습했다. 바람이 찼던 봄날이었고, 그 바람결에 악보가 날아갈까 소주병을 들고 웃고 있는 연예인 파일을 보면대 위에 함께 올려놓았다. 아직 시린 봄바람에 옆머리가 얼굴을 가려도 열심히 삐뚤빼뚤 활을 긋던 스무 살의 우리는 길거리에서 수줍지만 진지한 첫 버스킹을 했다. 소연주회가 끝나자 붉은색 첼로를 든 지연이 내게 다가왔다.

“너 나랑 첼로하지 않을래? 넌 비올라보다 첼로가 어울릴 것 같아. 이거 한번 들어 봐봐.”

친구가 건넨 붉은 첼로를 들어보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음대 전공자에게 함께 레슨을 받자는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소연주회를 끝으로 비올라를 동아리방 검정 피아노 위에 내려놓고 다시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낙원상가로 첼로 선생님과 함께 첼로를 사러 갔다. 그녀는 자신의 단골 악기점에 나를 데리고 가 연습용 첼로를 골랐다. 악기 가격이야 천차만별인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첼로 색상이 그토록 다양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단번에 마음에 드는 첼로를 골랐다. 다행히 그 첼로는 음색도 가격도 모두 예뻤고, 무엇보다 짙은 고동색이 내 가슴에 파고들어 왔다. 나는 코 묻은 돈을 꺼내 그 첼로를 등에 메고 하행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똥민아, 그 똥지게 지고 서울 다니는 거 힘들지 않아?”

레슨 있는 날 출근길 아버지 차를 얻어 타고 지하철역으로 갈 때면 뒷자리에 폭 누워있는 첼로를 보며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렴 좋다 하였다. 그리고 인사동을 걷다가도 가끔 이유 없이 낙원상가를 올라가 보곤 했다. 내가 번 돈 몇 달 치를 모아 처음으로 산 물건이 작지 않아서, 소모품이 아니어서, 매정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늘 생각지 못하게 가슴 가까이에서 울리는 악기를 품에 안게 되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

나경아, 엄마의 첫 용돈 벌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예학원 전단지를 돌리는 일이었어. 전단지를 가득 넣은 가방을 메고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부터 대문 틈 사이나 동그란 우유 투입구에 전단지를 말아 넣는 아르바이트는 한 동에 이천 원의 용돈을 받았지. 함께 전단지를 돌린 친구와 각자 만원을 벌어 부천역 지하상가에 가서 노란 별이 반짝거리는 우정 반지를 맞췄더랬지. 그리고 첼로를 사기 위해 다시 한번 아르바이트하였지. 주말마다 김포공항 아이스베리에서 빙수를 만들어 팔았고, 빙수 몇 그릇의 가격이었을까 제법 두툼한 돈 봉투를 갖고 낙원상가로 향했어. 그곳에서 산 어여쁜 첼로를 지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한 시간 반을 꼴딱 서서 가도 참 즐거웠어. 그리고 항상 그런 날엔 이 노래를 들었어. 바이올린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 노래에서는 바이올린 선율이 어찌나 감미로웠는지 몰라. 그 이후 첼로만큼 소망했던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기 위해 엄마는 마지막 아르바이트를 했지. 충동구매가 아니라 오랜 시간 소망하던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경험은 어린 날의 의미 있는 경험 같아. 이왕이면 네가 처음 스스로 마련한 돈으로는 늘 네 일상 가까이든 마음속 깊은 곳에서든 휘발되지 않고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물건을 샀으면 좋겠구나.


Track 23.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

작사 이현우 작곡 이현수, 김홍순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어제 아침에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 없나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올 수는 없나요

날 사랑 날 사랑 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