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27.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27. 우체통 앞을 쉬이 지나갈 수 없을 때

by 밍구


“우리 우체국에 갈까?”

나는 지도 앱에서 우체국의 위치를 확인한 뒤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도 갈래, 우체국! 우체국에서 뭐하는 거야, 엄마?”

나경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 나와 내 목을 끌어안으며 묻는다.

“바보야, 우체국은 편지 보내는 곳이야, 그것도 몰라?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한국에 키다리 할머니한테 편지가 날아가는 거야.”

시우가 나경에게 으스대며 말하는 게 제법이다.

“맞아. 그런데 시우야, 러시아 우체통은 빨간색이 아니다? 무슨 색인지 가서 봐볼까?”

나는 서둘러 편지를 가방에 넣고 아이들과 길을 나섰다.


인천 공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우랄산맥에 맞닿아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깔쪼보(Кольцово) 공항에서 처음 만난 겨울밤의 짙은 어둠과 맹추위, 러시아 특유의 쿰쿰한 냄새와 낯선 문자의 표지판이 내가 러시아에 왔다는 걸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한 학기 먼저 생활한 학교 여선배가 내가 묵을 방을 안내해줬다. 함께 방을 쓰게 된 언니와 기숙사 방문을 열었을 때의 뜨악했던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절대 누그러지지 않는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담배꽁초와 일 까페이카 더미 앞에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무탈히 일 년을 보낼 수 있을까.

주말이 되자마자 대형 쇼핑몰 메가(мега)에 가서 장을 봤다. 나는 커다란 세계지도와 알람시계, 빨간 스탠드를 샀다. 많은 것이 필요하고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았던 기숙사 이모저모에서 나는 책상 위의 작은 공간만을 생각했다. 커다란 지도를 펼쳐 더러운 얼굴을 감싸고, 집게 스탠드를 꽂아 이마를 밝히고, 귀퉁이에 앙증맞은 시계를 귀에 걸어 너의 시간이 당분간 나와 함께 흐를 거라며 낡고 작은 책상에 나는 말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면접관 교수의 말처럼 나의 학점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특히 회화 시간은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고, 피할 수만 있다면 저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과목 하나가 나를 버티게 해 줬다. 내가 1학기 수업 중 유일하게 좋은 점수를 받았던 수업은 삐시모(письмо), 쓰기 수업이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담배 찌든 내가 이미 겨드랑이에까지 베인 그녀가 가끔 입을 열 때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그녀의 담배는 쇳가루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될 정도로 잇속이 검던 그녀는 심지어 악필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학생이길 자처했다. 그리고 쓰기 말고도 편지라는 뜻의 삐시모는 내가 예까테린부르크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말하고 들었던 단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교 옆 빛바랜 상아색 건물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을 열면 늘 할머니 점원이 서 계셨다. 나는 학교 옆 반지하 서점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들렀다.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카드 진열대에서 매일 카드나 엽서를 한 장 사는 건 그 당시 내 유일한 과소비였다. 기숙사에 들어오면 나는 늘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는 그날의 트램표를 붙였고, 비슷한 일상에서 달라지는 예카의 거리를 묘사했다. 새빨간 숫자 54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카드에는 생신을 맞은 아버지에게, 탱크가 그려진 카드에는 이등병 친구에게, 귀여운 돼지 카드에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일기와 편지를 다 쓴 후에야 마지못해 러시아어 숙제를 했던 나는 꼴찌가 되는 게 당연하였고,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던 날들이었다.


“민아야, 까쨔가 너 편지 찾아가래.”

수업이 끝나고 학생식당으로 향하려던 내게 다른 반 선배가 말을 전했다.

51번 방의 까쨔는 러시아에서 만난 숱한 까쨔 중 가장 세련되었다. 도톰한 입술에 긴 금발머리, 러시아인답지 않게 서글서글 잘 웃는 푸른 눈동자의 그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늘 신났다. 세련된 그녀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 때문이었다.

“민아, 너는 여기에 편지를 쓰러 온 거야? 편지 쓸 시간에 공부하면 넌 아마 여기 온 한국 학생 중에 가장 우등생이 될 텐데 말이야. 자, 오늘은 무려 세 통이나 왔어.”

나는 그녀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러시아어로 써야 편지가 배송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하여 나의 소중한 발신인이자 수신인었던 그들은 썼다기보다 그린 듯한 러시아어로 주소를 적었다. 몇 번이고 연습한 후에 떨리는 마음으로 수신 주소에 적어 내렸을 러시아어가 그 시절 내게 눈물 자국 지을 위로였다는 걸 그대들은 알까. 일 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민 가방에는 예순일곱 통의 편지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

나경아, 현진건의 소설 중 <B사감과 러브레터>라는 단편이 있어. 여자 기숙학교에 날아오는 러브레터와 그 학교의 엄격한 노처녀 사감의 이야기인데 참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야. 엄마는 51번 방으로 향할 때 그 소설 속 처녀가 되는 기시감이 들었어. 그리고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속 주디가 다름 아닌 나였지. 엄마에게 예카테린부르크에서의 일 년을 한 단어로 함축하라면 ‘편지’가 아닐까 싶어. 그 시절 나는 러시아에서, 나와 가장 많은 필담을 나눈 친구들 또한 군대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그때가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성장을 하고 있었거든. 그중 무조건 기본 세 장 이상의 편지를 썼던 이등병 친구는 나의 편지가 와 있으면 훈련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보지 않고 아껴두었고, 읽은 편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내무반에서 돌려본 일화도 곁들어주었지.

딸아, 너의 시대에는 손편지가 더욱 예전의 것이 되었지. 그러나 우표수집이 취미인 엄마의 엽서와 편지지 과소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다양한 폰트로는 담아낼 수 없는 손글씨의 따스함을 네가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엄마가 매해 생일이면 꼭 작은 엽서에 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적어내리는 것처럼.



Track 27.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작사·작곡 김현성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날 저물도록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