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31. 지마 빌란 [Я тебя помню]

31. 아름다운 시절을 자물쇠로 걸어 잠글 때

by 밍구


“어머! 여기 이런 게 다 있네? 얘들아 이거 봐봐.”
항상 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들어선 필리공원에서 자물쇠 나무를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앞서 가던 아들딸을 불러 세웠다.
“엄마, 그거 뭐야? 나도 볼래. 안아 줘.”
금세 킥보드 방향을 틀어 내게 온 딸은 양팔을 들고 보챈다.
“응, 자물쇠야. 이것 봐. 예쁘지? 여기 어디 자물쇠 파는 곳 있나? 엄마도 자물쇠 걸고 싶다.”
나는 개성 넘치는 자물쇠를 하나씩 사진으로 남겨두며 자물쇠에 적어둔 이름과 날짜를 손끝으로 매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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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길이 노란 낙엽으로 물드는 것처럼, 겨울을 재촉하는 비에 서서히 온몸이 흠뻑 젖어드는 것처럼 나는 오군에게 마음을 깊이 내주기 시작했다. 러시아어가 능숙하고 불편한 것은 몹시도 싫어하는 그 덕분에 학생식당만 전전하였던 나는 시내 곳곳의 다양한 레스토랑 문지방을 넘게 되었고, 암막 커튼과 빨랫줄, 책꽂이 등을 뒤늦게 갖추며 기숙사 방이 조금 번듯해졌다. 무엇보다 나는 예카의 밤거리를 산책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스킨헤드가 기승을 부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존재만으로도 공포였고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그 시절 여자 유학생이 밤거리를 쏘다니는 행위는 금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덕분에 러시아의 밤빛이 얼마나 운치 있고 영롱한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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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행이 특기이자 취미인 사람이었다. 그 점이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큰 이유기도 하였다. 교수가 꿈인 그와 소설가가 꿈인 나 사이에는 은근히 공통점이 많았으며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몹시도 달콤했다. 러시아에 오기 직전 처음 쓴 단편소설과 스물한 살의 자서전을 그에게 보여주자 그는 내게 기다렸다는 듯 연두색 스크랩북을 건넸다. 방으로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펼친 스크랩북 안에는 그의 여름방학 행보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조지아에서의 봉사활동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서의 특별한 활동이라 더욱 눈이 갔고, 그의 온정이 느껴져 좋았다. 스크랩북을 빌려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가 조지아를 폭격하였고, 그가 머물렀던 작은 동네에 사는 아이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날 밤 그는 내게 기대 울었고, 나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늘 자신감 넘치고 의젓했던 그가 내 앞에서 처음 눈물을 보였던 날, 나는 조지아에 그와 함께 언젠가 꼭 가겠노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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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강민아’라는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싶기도 하고….”
여행지의 우체국을 꼭 가는 나와 서점을 가는 그는 묘하게 닮았고, 나는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런 내게 나에게로의 여행을 꿈꾼다고 말해주는 그가 있어 나는 행복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밤 마야콥스키 공원 동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첫 키스를 했다. 공원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열 발자국 걸으면 서 있는 가로등 수만큼 우리는 입을 맞췄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시처럼 ‘그대와 나는 모스크바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거기엔 다리가 긴 사람이 부족하’였으므로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를 걸어 긴긴 호흡을 함께하였다. 그날 밤 일기에 생애 다시 없을 첫 키스를 묘사하고 싶어 그에게 몇 번이고 다시 해달라고 졸라댔던 나는 정작 딱 다섯 글자, ‘마야콥스키(Маяковский)’만 쓰고 양치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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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카를 떠나기 전 자주 산책했던 이세티(Исеть)강 다리에 자물쇠를 걸었다.
“오빠, 왜 여기에 자물쇠를 거는 거야?”
러시아 바보인 나는 걸려있는 자물쇠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러시아 박사인 그에게 물었다.
“여기에 지금 이 시간을 잠그는 거야.”
그는 클립 끝으로 어설피 우리의 이름을 새긴 자물쇠를 철컥 걸었다. 그리고 열쇠를 이세티 강에 힘껏 던졌다.


***

나경아, 엄마는 모스크바를 사랑하지만 나의 첫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를 항상 그리워하고 있단다. 스물둘 나와 그가 잠겨 있는 그곳을 떠나올 때 네 아빠는 십 년 후에 꼭 다시 가자 했지. 그러나 우리가 만난 지 십 년 되던 그해 가을은 너를 낳느라 한국에 있었지. 또렷이 기억나. 마침 그날은 네 오빠가 처음으로 어린이집 가을소풍을 떠난 날이었거든. 어린이집 앞에서 관광버스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한국의 가을 정취를 느끼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골목을 돌아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엉엉 울었지 뭐야. 그날 밤 소풍 사진 속 샛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시우를 보며 또 어찌나 울었는지 몰라. 지금 돌이켜보면 산후 우울증이었던가 싶기도 해.
비록 약속한 그날은 지킬 수 없었지만, 언젠간 우리 가족은 예카를 가게 될 거야. 엄마와 아빠의 모든 처음이 잠들어 있는 곳.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가수 지마 빌란의 이 곡이 담긴 앨범명은 운명적이게도 Время Река(시간의 강)이야. 아마 이세티 강에 엄마와 아빠가 걸어둔 그 자물쇠는 없어졌겠지. 그러나 열쇠를 삼켜버린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 속에 엄마와 아빠의 사랑은 굳건했고 그를 입증하는 너와 시우가 함께라면 엄마는 더없이 행복할 거야. 대신 엄마는 다시 그 다리에 우리 가족의 안녕과 사랑을 잠그고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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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31.
지마 빌란(Дима Билан) [Я тебя помню (난 너를 기억해)]
작사·작곡 Олег Толстов

Этой волшебною, бархатной ночью
Я не могу уснуть, что-то мешает
Может случайно, а может нарочно
Только тебя опять я вспоминаю

В небе загорится новая звезда
Яркий луч её взлетит ко мне в ладони
И, возможно, ты почувствуешь тогда
Я тебя помню, я тебя помню

Это наедине кажется странным
Может быть, эта грусть утром растает
Сердцу порою так непостоянно
Только тебя сейчас мне не хватает

В небе загорится новая звезда
Яркий луч её взлетит ко мне в ладони
И, возможно, ты почувствуешь тогда
Я тебя помню, я тебя помню

В небе загорится новая звезда
Яркий луч её взлетит ко мне в ладони
И, возможно, ты почувствуешь тогда
Я тебя помню, я тебя помн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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