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새로운 구속을 향한 고속열차를 탔을 때
“엄마, 우리 러시아에는 언제 돌아가? 나 집에 가고 싶어. 러시아 집.”
한국에서 보름 정도 지내고 나면 시우는 어김없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독 한국에 가는 걸 시우는 싫어한다. 러시아 집에 두고 온 커다란 애착 인형 때문인지 홀로 남겨두곤 온 아빠 때문인지 한국에서의 체류가 길어질수록 아이는 힘들어하고 기어이 병이 나고 마는 것이다.
“시우야, 우리도 방학 때 한국에 잠깐 다녀올까? 가면 시우 먹고 싶어하는 젤리 잔뜩 먹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아이에게 슬쩍 한국행 비행기에 관한 이야기를 흘려보지만, 아이는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도리질 친다.
“나도 갈래, 한국. 비행기 타고 할머니한테 갈래!”
한국에서의 생활이 갑갑하다고 여기는 아들과 달리 신기하고 즐거운 것투성이라 여기는 세 살 어린 딸은 한국 얘기가 나오면 즐거워 방방 뛴다. 우리 셋은 구속과 즐거움 사이에서 결국 방황하게 된다.
예카에서의 일 년은 마지막 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학기를 마치는 시험 일정이 공지되었고, 지난 학기 고배를 마셨던 악몽의 회화 시험이 가장 마지막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구월학기가 신학기였던 까닭에 첫 번째 학기 때보다 수업을 좇아가기 수월했으나 회화 선생님 특유의 딱딱한 표정은 여전히 날 긴장시켰다.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마치 일 년 전 교환학생 면접을 연상시키는 시험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오늘 날씨와 나의 장래희망, 어제 일과와 겨울방학 계획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 문을 웃으며 열고 나오자 오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 잠시 내게 와 보겠니?”
회화 선생님은 우리 둘을 잠시 불러 세웠다.
“내일 한국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이건 너희를 위한 선물이야. 부디 이곳을 잊지 말고 건강하려무나.”
선생님은 나와 오군에게 예쁜 카드와 함께 책 학 권과 보드카 한 병을 선물했다. 그건 가장 공부를 잘했던 학생과 꼴찌에게 주는 유종의 미를 담은 선물이었다. 너무나 의외의 인물에게 받은 선물은 내가 이곳에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나는 러시아어가 빼곡한 소설책을 이민 가방 깊숙이 옷에 둘둘 말아 넣었다. 회화 시험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소설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선생님의 책장에 꽂히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런 작가가 되어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유창한 러시아어로 그간 잘 지냈느냐며 그때 당신의 선물이 참으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랐다.
“민아, 우리 한국에 돌아갈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갈까?”
기말고사를 치르기 일주일 전, 오군은 마야콥스키 공원에서 내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표를 두 장을 건넸다. 열차표에는 크리스마스 날짜가 찍혀 있었다. 그가 내게 준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우리는 열흘에 걸쳐 러시아와 천천히 낭만적으로 작별을 고하기로 약속했다.
차창 밖 풍경은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숲과 평야, 하얀색 자작나무가 눈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우리는 객실의 위아래 칸에 자리를 잡았다. 잠잘 때를 제하고는 그가 아래 칸으로 내려와 가운데 테이블을 올리고 마주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스물여섯의 남자와 스물둘의 여자에게 열흘 동안 일상이 멈추고 창 밖 풍경과 연인만을 바라보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나는 두려웠다. 러시아에서 같은 기숙사와 대학에서 생활하였던 우리는 한국으로 들어가면 교집합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집과 대학도 달랐고, 우리와 함께 추억을 쌓은 친구도 그곳에는 없었다. 나는 공책을 꺼내 그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썼고, 각자의 인간 관계도를 그리자고 제안했다. 그룹별로 각자의 친구들 이름을 쓰고, 그 친구에 대한 정보와 추억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날도 다시 공책을 꺼내 내가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먼, 혹은 이미 고인이 된 친척에 대해서까지 썼다. 그리고 셋째 날 우리는 한국에서 함께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자그마한 소책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 쓰면, 그가 하나를 쓰고, 다시 내가 하나 쓰면 그가 쓰며 꼬리를 물듯 250개의 함께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소책자를 만들다 보니 각자 즐겨 다니던 곳, 좋아하는 여가 활동, 꿈꿔왔던 연인과의 데이트 모습, 앞으로의 계획 등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장 맨 끝의 한 줄은 결혼하여 서로를 닮은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우리의 낭만을 싣고 쉼 없이 달려 우리를 한국에 닿게 해주었다.
“우리가 또 러시아에 올 일이 있을까?”
열차의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을 응시한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나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넌 러시아에 분명 다시 오게 되어 있어.”
그는 당연하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나경아, 평범하고 당연했던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한 계절, 혹은 일 년, 아니면 어느 시절을 보내고 다시 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때에 그곳으로 향하는 교통수단이 기차였으면 좋겠구나. 비행기는 너무 빨라 네 몸과 마음의 시차를 헤아려주지 못하고, 울렁거리는 배는 너의 사색을 방해할 것이며, 자동차는 그곳과 이곳의 경계가 모호한 수준의 거리에 불과하겠지. 기차는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곳에서, 눈에 선하지만 어딘가 변해있을 너의 안식처로 데려다 주기에 알맞은 속도와 풍경을 선사해줄 거야.
대학교 삼 학년, 한국에 있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즐거움과 자유를 만끽했지. 심지어 연인까지 생겨 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스물둘의 예카를 뒤로 하고 기차에 몸을 실을 때 엄마는 참 아쉬웠어. 자리에 앉아 차창 너머로 손 흔들어주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우리의 시베리아 횡단은 시작되었지. 하루하루 점점 한국에 가까워질수록 달라질 일상에 대한 두려움과 대학교 4학년에 대한 부담감, 보고 싶은 부모님 생각이 한 데 어우러져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창밖을 자주 바라보았지. 내 시선이 머물던 곳에 펼쳐진 눈 내린 러시아의 드넓은 들판과 하얀 자작나무는 내게 꼭 다시 오라는 말을 하는 것만 같았어.
‘구속’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어감을 줄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이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운 구속을 꿈꾸며 사랑도 학업도 조금 더 바짝 나를 조여주는 일상으로 달려가고 있었어.
Track 32. 김종서 [아름다운 구속]
작사 한경애 작곡 김종서
오늘 하루 행복하길
언제나 아침에 눈 뜨면 기도를 하게 돼
달아날까 두려운 행복 앞에
널 만난 건 행운이야
휴일에 해야 할 일들이 내게도 생겼어
약속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조금씩 집 앞에서
널 들여보내기가 힘겨워지는 나를 어떡해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사랑에 난 빠져 버렸어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아름다운 구속인걸
사랑은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
살아있는 오늘이 아름다워
조금씩 집 앞에서
널 들여보내기가 힘겨워지는 나를 어떡해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사랑에 난 빠져 버렸어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사랑에 난 빠져버렸어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내 앞에 니가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