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정든 동네와 작별할 때
“내일은 라멘스코예에 갈 거야. 옛날 우리 살던 동네. 시간 되면 기드라도 들려보고, 역전 시장에서 과일도 사오자.”
나는 짐가방을 싸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거기가 어디야? 멀어?”
나경은 살아본 적 없는 옛 동네를 마치 명절 때만 찾아가는 친숙하지 않은 시골처럼 대하듯 묻는다.
“응, 차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해. 오빠가 지금 나경이만 할 때까지 살았던 동네야. 그곳에서 살 때 너는 엄마 배속에서 꿈틀거렸고. 거기에는 엄마가 사랑하는 것투성이야.”
나는 일로나에게 줄 선물도 잊지 않고 챙기며 말한다.
결혼하여 러시아에 둥지를 틀고 여태까지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 두 번의 이사는 모두 라멘스코예 안에서 이십 분 거리의 고만고만한 이사였지만, 마지막 이사는 라멘스코예에서 55km가량 떨어진 모스크바 시내로의 이사여서 체감온도가 남달랐다. 특히나 세 번째 동네 루취스따야(Лучистая)에서는 친한 친구를 사귄 까닭에 아픈 이별을 견지해야 하는 힘이 필요했다.
이삿날 아침. 식전 댓바람부터 들이닥친 짐꾼들이 짐을 싸고, 그것들을 이사 트럭에 옮기는 동안 시우와 나는 일로나네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시울로 작별인사를 하는 일로나를 보니 나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작별의 포옹을 했다. 나의 일로나(Илона)와 료샤(Лёша). 아마도 내 마음에 아로새긴 이들의 이름을 일기장에서 지우면 러시아에서 쓴 일기장의 두께가 반으로 줄고 말 것이다.
"아까 앞집 할머니가 잠깐 집에 왔었어. 선물이라며 뭘 들고 오셨던데 앞집에 한 번 가보든가."
일로나네서 돌아왔는데도 아직 짐 싸기가 한창이었다. 시우와 더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난처하던 차에 남편이 내게 말했다. 까쨔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열린 문 사이로 까쨔와 그녀의 고양이 끼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시우가 문을 확 열어 재끼고 끼사를 잡으러 들어간다. 저의 집인 양 익숙한 까쨔의 집에서 시우는 까르르 거리며 잘도 논다. 점심때가 되어오자 까쨔가 분주해졌다.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블린과 스메따나, 감자, 소시지 등을 꺼내어 나와 시우의 점심을 챙겨주었다. 그녀가 차려준 마지막 오찬이었다.
나의 연로한 친구, 까쨔.
나보다 곱절, 그보다도 몇십 해를 더 살아온 이를 친구로 맞이한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친구의 죽음을 맞닥뜨려야 할지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터무니없지 않은 무언의 공포를……. 어쩌면 나의 늙은 친구의 영원한 부재를 겪지 않고 여기서 작별하는 게 내겐 행복일지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다. 점심상을 물리자 까쨔가 내게 작별선물을 건넸다. 일전에 내게 보여줬던 러시아 육아서적과 고양이 그림이었다.
"너는 친절한 아이니까 새로운 집에서도 좋은 이웃을 사귈 거야. 건강하고 늘 행복하길 바라마, 나의 민아."
까쨔가 날 안아주며 건넨 작별 인사에 결국 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아까 일로나 앞에서 삼켰던 눈물까지 모아서 와앙 쏟아내니 까쨔가 주름진 손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외롭지 않았어요. 난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해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까쨔 앞에서 참았던 눈물, 라멘스코예와의 석별을 감추지 않고 다 쏟아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웃으며 바라봐주었다.
261호. 세간이 몽땅 빠진 텅 빈 261호의 모습은 퍽 낯설다.
"시우야, 여기 어디야? 시우네 집이지? 이제 안녕하고 우리는 모스크바 새집으로 가는 거야. 그동안 고마웠어, 라고 시우가 말해줘."
나는 마지막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꾹꾹 밟으며 사진으로 남겼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잘 있어, 나 갈게. 내일 또 만나."
네 살배기 아들이 나를 따라 텅 빈 집 이곳저곳에 잠든 집의 정령에게 인사를 한다.
"시우야, 여기는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은 만날 수 없어. 이럴 때는 영원히 안녕, 이라고 하는 거야."
'영원히'라는 부사를 쓰고 나니 퍽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만다. 나는 왜 이렇게 미련이 많은 사람인 걸까. 새집에 대한 설렘, 모스크바에서의 더욱더 윤택하고 편리한 삶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남들이 보기에는 감옥이자 유배지, 창살 없는 감옥 같다던 말을 듣던 이 집이 가슴에 아름답게 맺혀 자꾸만 뒤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생후 팔십 일된 시우를 데리고 첫 문턱을 넘어 삼 년 남짓의 시간 동안 초보 엄마로서 시우와 함께 모든 처음을 이 집에서 맞이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유산의 아픔도, 그마저도 소중한 경험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둘째를 30주까지 품어낸 보금자리도 다름 아닌 이곳이었기에. 나는 포대기로 시우를 업고 자장가를 부르며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복도를 서성이던 젊은 날의 나를 추억한다.
"민아, 이제 그만 가자. 이러다 늦겠어. 올라가서 짐 풀려면 또 한참 걸릴 거야."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에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에 운동화를 꿴다.
"다음에도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랄게. 삼 년 동안 우리 가족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줘서 고마워."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나의 세 번째 러시아 집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모스크바 새집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
나경아, 엄마에게는 러시아의 요람과 친정이 있어. 러시아의 모든 처음이자 전부였던 예카테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는 내게 러시아 요람이고, 러시아 친정동네는 모스크바주 중 하나에 속하는 라멘스코예(Раменское)야. 지금은 모스크바 시내에 살고 있지만, 서류상으로나 심적으로나 외양으로나 엄마는 모스크바보다 그곳에 사는 모스크바 촌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너를 배 속에 품고 그 동네를 떠나올 때 나는 많은 것을 그곳에 두고 왔고, 그것들은 숲의 요정처럼 지금도 동네 구석구석 잘 숨겨져 있더구나. 그곳에 갈 때면 단골 레스토랑과 역전 시장, 기찻길과 육교, 슈퍼, 어린이 문화센터, 숲과 호수, 정교회 사원, 여름이면 문을 여는 크바스 할머니와 거리의 수박장수들 어느 하나 눈길이 닿지 않는 것 없이 모두 사랑스럽고 그대로라서 참 다행이고 기뻐. 일 년의 두세 번. 어쩌면 한국의 진짜 친정동네보다 더 가까이에서 더 자주 지친 나를 어루만져주는 장소가 러시아에 현존하여 감사한 마음이야.
딸아, 네가 기억하는 첫 집은 지금 이 집이 되겠구나. 모스크바에 와서는 이 집에서 단 한 번도 이사해본 적이 없네. 이전 집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했었는데 이제는 이 집에서 이사를 한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을 만큼 우리 가족은 이 낡은 집과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졌지. 사람보다도 생명 없는 것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나의 자유이며 권한이고, 그와 동시에 함부로 식지 않아 더 애를 먹게 되기도 하더구나. 마음속에 너의 민속촌이 차려지는 날, 그래서 그곳의 모든 인물과 풍경이 눈 감으면 살아 움직이는 때에 이 노래를 들어보렴.
Track 46.
동물원 [혜화동] 작사·작곡 김창기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길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어릴 적 함께 꿈꾸던
부푼 세상을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언젠가 돌아오는 날
활짝 웃으며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길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라라랄라라 랄라랄라라
라랄랄라라라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라라랄라라 랄라랄라라
라랄랄라라라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라라랄라라 랄라랄라라
라랄랄라라라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